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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 Jul 14. 2020

아버지를 추억하며

49재에 아버지에 대한 글을 씁니다.

이제야 아버지에 대한 글을 씁니다. 게으른 저를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이러한 글을 써도 되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차츰 희미해질 기억을 고이 보관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헤아려 주십시오. 


아버지는 전립선 암으로 투병하시다가 지난 5월 27일 수요일 오전에 소천하셨습니다. 당시 집에서 걸려온 전화는 소리부터 다급했습니다. 


"임종하실 듯하다. 빨리 내려와라!" 


그 한 마디에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언젠가' 이 순간이 다가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때가 되자 마주하기 두려웠습니다.


황망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더군요. 부랴부랴 진료를 마치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만사 제쳐두고 차를 몹니다. 가는 길에 하염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이 웁니다. 신문으로도, 문자로도 접했던 무수한 부고 소식들. 남의 일이 더 이상 남일이 아닙니다. 


고향에 위치한 OO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친할머니도 이 병원 장례식장에서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본인이 명을 다 하면 이 병원으로 옮겨달라고 유언하셨습니다. 


첫째 날, 둘째 날은 오가는 문상객들을 맞이하며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셋째 날 발인 때 아버지를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수의를 입고 가지런하게 누운 형체가 보입니다. 


아버지는 반듯하게 누워있었습니다. 오랜 투병생활에 지쳐 몰라보게 말라버렸습니다. 


"삼촌, 왜 이리 말랐소?" 


사촌 형이 울부짖었습니다. 아버지의 손과 발은 수의에 덮여서 직접 만질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을 봅니다. 뺨과 이마를 만져봅니다. 서늘합니다. 아픕니다. 무척 아픕니다. 임종을 못 지켜서 아픕니다. 그동안 면회를 제대로 못 해서 아픕니다. 


근 몇 개월 동안 병원에서는 면회를 금지했습니다. 코로나 19 확산에 모든 병원에서 취한 조치입니다. 전염은 막았지만 아버지의 마음도 막았습니다. 외로워서인지 그즈음 전화를 자주 하셨습니다. 그동안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못 봤습니다. 돌아가시기 2주 전에 병원의 허락을 받아 10분 정도 면회를 갔던 게 전부입니다. 그때마저 못 봤다면 죄스런 마음이 얼마나 컸을까요.


큰아버지를 저를 부릅니다. 떠나는 날 아침 아버지가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답니다.  "형님, 너무 힘들어요!" 그 말 한마디 남기고 전화는 끊겼습니다. 그 얘기를 하며 큰아버지는 매미같이 웁니다. 


친형이 '티벳 사자의 서'를 가져왔습니다. 죽은 자가 49일 동안 사후세계를 잘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내용입니다. 장례식장에서 형은 밤마다 날짜에 맞춰 책의 내용을 낭송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로서 49일이 되었습니다. 다른 지역에 있는 형과 저를 대신하여 어머니가 홀로 납골당에 갔습니다. 그리고 '티벳 사자의 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습니다.  


며칠 전 아버지를 꿈에서 봤습니다. 침상에 누워있다가 제가 부축하니까 일어나서 걸으시더군요. 다리가 마비된 몇 개월간 아버지가 그토록 바랬던 걸음, 걸음, 걸음. 이제는 걸을 수 있지요? 그걸 보여주려고 꿈에 나타나신 거죠? 


지금 아버지는 어디 계신가요? 아픔도 절망도 없는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새로운 생명의 문을 열어젖히고 좋은 일만 가득하세요. 아버지! 


2020년 7월 14일 화요일 아버님의 49재를 맞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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