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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 Mar 08. 2020

화날 때 제대로 화내라!

화를 잘 못 내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 

오래된 기억 하나. 

한의사 면허를 따고 공중보건의사가 되어 시골 보건지소로 배치를 받았다. 내가 근무하는 한방과에는 보건직 공무원이 한 분 계셨다. 보통 '여사님'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진료 보조 및 행정 업무를 담당한다. 적어도 일 년 동안 함께 지내야 하기에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다. 한방과 여사님이 매우 활달하고 수다스러워 어색함을 빨리 풀어줬다.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곧 문제가 생겼다. 그녀는 진료시간에 시도 때도 없이 타 보건지소 동료들에게 전화를 해댔다. 그 특유의 하이톤에 까르르 웃는 소리까지. 할머니, 할아버지를 치료하다가도 목소리가 크게 들리면 신경이 몹시 거슬렸다. 


불편하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행의 시작이었다. 자, 들어보시라. 그날도 우리 여사님은 자지러지게 웃으며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통화가 끝나자 나는 따끔하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여사님. 보건소 전화를 그렇게 사적으로 함부로 쓰셔도 되는 거예요? 공적으로 쓰시면 좋겠네요."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 순간부터 다른 보건지소로 이동하는 그 날까지 우리 관계는 매우 냉랭했다. 사무적인 이야기 한 두 마디 외에는 하루 종일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이웃 보건지소 여사님들이 '그렇게 잘 지내시더니,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어보았겠는가.


어디서 잘못했을까? 싫은 소리를 해서가 아니다. 문제는 내용이다. 애초에 전화기 사용 자체를 문제 삼으면 안 된다. 실제로 불편했던 부분은 환자 진료시간에 전화 소리가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된다는 것 아닌가?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


"여사님. 진료할 때는 제가 집중을 해야 하거든요. 전화하더라도 목소리는 좀 낮춰주세요!" 


일 년 동안 최악의 인간관계를 보내고 얻은 소중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화를 내는 건 좋다. 다만 그 사람의 잘못을 정확히 지적해야 한다. 어설프게 역린을 건드리면 잘못한 사람이 성낸다. 


또 다른 장면 하나. 


한의대학교 향우회에서 의료봉사활동을 갔다. 본과 2학년이라는 이유로 회장직을 맡았기에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봉사를 왔으니 현수막을 크게 붙여야 한다. 후배와 함께 마을 한복판에서 현수막을 설치하고 있었다. 여자 후배 하나가 지나가다가 장난 삼아 나를 툭 쳤다. 땀이 뻘뻘 나는데 한가하게 돌아다니면서 장난치는 모습이 순간 괘씸했다.  "야, 조심해!"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 친구는 그 순간 이후 나에게 한 마디도 안 했다. 


저 상황에서 밑도 끝도 없이 화를 낸 게 문제다. 이렇게 말하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내가 지금 더워서 장난받아주기 좀 힘들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그 이유를 차분하게 얘기했더라면 그 친구도 본인의 실수를 인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화를 내니 되려 자신이 피해자라고 느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기억들을 떠올리니 씁쓸하다. 그럼에도 불편한 진실을 직면해야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화를 잘 내야 한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제대로 못 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말이다. 


최근 어떤 형과 전화통화를 했다. 상당히 심각한 내용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말 한마디를 꼬투리 잡아 그 형이 실없는 농담을 했다. 그냥 참으면 내가 며칠은 속앓이 할 말이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내 감정과 이유를 밝혔다.


"형. 말조심해요. 나 지금 그런 말 할 기분 아니야." 

"아, 미안하다. 내가 괜한 말을 했네."


그 형은 흔쾌히 내 말을 이해하고 자신의 실수를 사과했다. 


보통 화를 내지 말라고 한다. 참을 인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참으면 나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 가해자가 밉기보다, 참기만 하는 내가 병신 같고 답답해 보인다. 내가 성인군자가 아닌 다음에야 화는 없어지지 않고  남 아니면 나를 향하게 되어 있다. 애꿎은 나를 잡지 말고 잘못한 상대방에게 당당하게 말하자. 하지만 요령은 필요하다. 당당하게 말할 때 포인트가 분명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미안함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역정을 낸다. 


화를 내거나 싫은 소리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하자. 자신에게 당당해지고 남에게 마땅한 사과를 받도록 하자. 상대방의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고, 그로 인한 나의 감정을 표현하며 상대방에게 시정을 요구하라. 그래야 그 사람과 더 좋은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 이제부터 화를 낼 때는 제대로 화 내보자. 분명히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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