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아포가토 브륄레
나비효과.
이번 글은 반성의 기도로 시작해야겠습니다. 잠시 늦는 지각은 있었어도, 지난 교리공부며 미사를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던 주말의 기쁜 루틴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일상을 너무도 촘촘히 채우려 하다 보니 소화를 시키지 못한 피로는 누적되어, 이른 아침 운동 뒤 마침내 머리가 핑 돌아 드러눕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아파도 학교에 가서 아파!'라며, 열이 나는 초등생 아들의 등을 떠밀며 '출석'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키워 주셨건만 (덕분에 초등 6년 개근, 중학교 고등학고 6년 정근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얼마 전부터였습니다. 최근의 아픔? 과한 스트레스? 아무튼 그런 것들을 잊고자 하루하루를 일 이외에도 다른 의미 있는 것들로 가득 채우려던 저에게 친구가, '뭐 이리 빡빡하게 살아? 자꾸 상황 의식하지 말고 여유도 좀 찾으렴!'하고 이야기해 준 것이 참 지혜롭고 고맙게 느껴집니다. 아무튼, 하나의 어긋남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조금씩 커져가는 불안을 낳았고, 결국 새벽 운동 후에 마치 '이제 그만 쉬지 그래'라는 몸의 신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몇 시간을 끙끙 앓는 소리 해가며 자고 일어나서 좋아하는 카페에 들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사 중 강론에는 ‘에파타’ 일화가 소개됐습니다. 마르코 7장에서 전하는 예수님이 행하신 한 기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마르코 7.31-35)
이는 구약의 예언을 예수님이 실현하셨다는 의미이며, 곧 믿음으로 기적이 행해졌다는 증명이다,라고 강론은 설명했습니다.
강론에선 아시아 최초의 청각장애 사제인 박민우 마태오 신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박 신부님은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하지 못하는 ‘농아인’입니다. 그는 사제 서품을 받고 많은 청각장애인 신자들을 위해 수어(手語)로 미사를 진행하십니다. 박 신부는 외국어 수어도 할 수 있어 미국의 간곡한 요청으로 시카고로 옮겨 워싱턴 대교구 농아인 본당 사제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박 신부님은 귀가 들리지 않아 화재 경보를 듣지 못해 목숨을 잃을뻔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가 사제 서품을 받기 전부터 그를 도운 이들이 많은데, 한 신부는 ‘수화’를 배워 박 신부님을 도와 통역을 도맡아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의 본당 주임 신부님은 박 신부님을 만났던 이야기를 하며, “나중에 배운 수화 치고 너무도 능통해서 오해 없이 박 신부님의 믿음과 의미를 전하고 있어 놀랐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화가 와닿았던 이유는, 저도 완전히는 아니어도, 오감 중 일부의 상실과 그에 대한 불편을 깊이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과거 큰 병을 낫게 하느라 한쪽 귀는 대가로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화를 배우고 익혀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에서의 불편함은 저뿐만이 아니라 타인도 겪습니다. 사회에서 저와 소통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저만의 이러한 치우친 사정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저와의 대화에서 의아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귀가 두 쪽인 이유는 사방의 소리를 잘 듣도록 함인데, 한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면 사방의 절 반 정도의 위치에서 나는 소리는 묵음(默音)이거나 반음(半音) 정도로 식별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부르는 이가 여러 번 부르게 하거나 말하는 이는 여러 번 말하게 합니다. 언젠가 연인이 제게 '들은 척 웃기만 하는 얼굴이 마음이 아파'라고 할 때 사람들도 불편하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다른 한쪽 귀는 멀쩡하니 어찌어찌 살아가고 있지만, 그 귀도 언젠가는 노화나 병환으로 제 역할을 못 하게 될 수 도 있음을 알기에 요즘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수화를 배워둬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두 개일 때는 몰랐다. 하나가 될 줄을.
하나가 되어보니 알겠다.
다른 하나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성당에 다니다 보니 저는 귀가 두 개일 때도, 하나일 때도 잘 듣지 못하고 잘 말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주 나의 주장이 옳다 하고 상대는 그르다 했으며, 쉽고 편한 말 대신 직설적이고 모진 말로 아픔을 주기도 했습니다. 둘 다 없이 많은 이들에게 수화로 복음을 전하는 신부님도 있는데, 난 둘 다 멀쩡할 때도 제대로 뜻을 전하거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있으되 없는 사람처럼, 소중한 이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믿음을 잃기도 했습니다.
성당이라는 공간을 알고, 교회라는 공동체를 만나고, 성실히 기도하고 조용히 묵상하고, 좋은 일 하고 자각과 노력을 많이 하며 살면 제게도 귀와 혀로 지은 죄를 씻는 ‘에파타의 기적'이 있을까요?
이 날의 강론 에파타의 기적 일화로부터 저는 '더 나은 나'를 되뇌며 무리했던 것 같습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운동을 하고, 그저 자유롭게 또는 나태하게 쓰던 글을 일정을 정해 더 열심히 쓰고, 밤에는 기도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더없이 보람찬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그러했던 나를 부정하고, 마치 경기장에서 가짜 토끼를 쫓는 그레이하운드처럼 실체도 없는 스스로의 이상향을 바라며 달린 것은 건강하지 못한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돌이며 보면, 원래의 나도 꽤 많은 일들을, 좋은 사람들 곁에서, 기쁘게 성취하게 된 행운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저 최근의 어떤 일로 괜히 의기소침했던 것은 아닌지. 그래도 이런 삶 속에 조금의 여유로움도 섞어서, 새로 시작한 일들은 '건강히' 이어가 보려 합니다. 미사 날 아침에는 되도록 과한 운동은 하지 않고요.
오늘 글을 쓰며 마신 커피는 '아포가토 브륄레'입니다. 좋아하는 카페 사장님이 개발한 이곳 만의 시그니쳐 메뉴입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를 넣는 일반적인 '아포가토'에, 달달한 설탕을 올리고 그 표면을 토치로 그을려 굳히면 달콤한 과자 같은 막이 생기게 됩니다. 마치 어린 시절 즐겨 먹던 '뽑기'같기도 합니다. 카페인에 당, 지방에 식감까지. 피로가 극심한 일요일 오후에 어울리는 최고의 커피가 아닐까 합니다.
평소 운동을 즐겨하는 사람들은 잘 먹지 않는 맛있는 것들이 듬뿍 들어있는 음료. '악마의 커피'란 이런 것을 말하는 걸까요? 가톨릭 신자로써는 '천상의 단 맛'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