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씻는 예식 -2-
성탄절을 열흘 앞둔 12월 15일은 저의 두 번째 생일이자 일생 단 한번일 천주교 세례식 날이었습니다. 세례식 당일 일찍 대부를 모시고 서둘러 성당으로 갔습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성당은 평소보다 더 활기차 보였습니다.
세례식은 신부님의 표현대로 성당의 '잔칫날'입니다. 수개월간 교리 공부에 애쓴 예비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새날이요, 그들을 보살피며 가르치고 이끈 신부님과 수녀님, 교리 봉사자분들에게는 뿌듯한 결실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당에 들어서자 입구에서 봉사자님이 꽃을 하나 달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명이 적힌 명찰을 오른쪽 옷깃에 달아주셨습니다. '미카엘'. 이 것이 저의 세례명이자 앞으로 개인으로도 집단의 구성원으로도 선량하게 살아가라는 무거운 책임의 이름입니다.
미사 전 예행연습을 마치고 화장실에 가서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정돈했습니다. 거울에서, 집을 떠나올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겉옷의 덜렁거리는 단추를 발견했습니다.
'실오라기 다 풀어져
달랑달랑 매달린 단추는
참 오래 견뎌
여기까지 왔다'
나의 모습을 닮은 단추가 가여운 마음이 들어 잠시 어루만지다가, 조금 더운 듯도 해서 정장의 재킷만 입기로 하고 외투는 벗어두었습니다.
미사 통상의 절차 중 세례를 진행하게 되는데, 원활한 진행을 위해 세례식을 받는 예비 신자들은 모두 본당 제일 앞자리에 앉게 됩니다. 저는 14명 예비신자 중 제일 처음에 위치했습니다. 성유(성스러운 기름)의 의식 때도, 물을 이마에 붓는 세례식 때도, 영성체를 모실 때도 가장 먼저 나가야 해서 실수가 있으면 안 되기에 과정을 머릿속으로 여러 번 새겼습니다.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오늘이 우리 성당 잔칫날, 세례식이 있는 날이에요" 하시며, 저희 세례명을 한 명 한 명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수녀님 피정 시간에 모두각자가 쓴 '하느님께 보내는 편지'를 전날 감명 깊게 읽어보셨다며, 그중 두 편의 편지를 읽어주셨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제가 쓴 편지였습니다.
'하느님께. 하느님, 저를 이곳으로 이끈 분, 하느님 맞지요?
그동안 그저 원만함에 기대 큰 노력이나 의미 없이 세상을 살았고, 자주 이기적인 말과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제가 선 기반 저 스스로 무너뜨리며, 어떻게든 버텨 서면서도 위태한 현실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해 참회와 바람으로 이어진 편지를 신부님께서 정성껏 읽어주시는데, 울컥했습니다. 하지만 눈물을 삼켰습니다. 제가 쓴 편지라는 것을 아직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용 중 첫 구절, 하느님께 드린 질문에 대해 저는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세례식 직전에 부주임신부님이 저희에게 첫 영성체를 모실 때 하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잘 들어주신다며 소원 세 가지를 잘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영성체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제정하신 일종의 상징적인 예식입니다. 포도주는 하느님의 피, 밀떡은 하느님의 몸이라고 하시며 감사를 드리고 이를 받아 마시고 먹는 것을 영성체 예식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의 몸', '예수님의 피' 라 하니 무섭다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편치 않은 표현이고 절차였습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성찬례를 제정하시다'라는 제목으로 그 예식의 최초를 소개합니다. 제정(制定)이란 만들어 정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전에는 없던 것을 예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루카 22:20)
예수님은 당시 흔한 포도주와 빵을 표징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의 빵과 한 동이의 포도주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나타내려 하셨습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피로 맺어진 가족뿐만 아니라 함께 신뢰로써 공동체의 가치를 공유하는 집단을 한 식구(食口)라 부르는 것에서 '나누어 먹는다'는 것의 상징성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코린 10:16-17)
저는 첫 영성체를 모실 때 세 가지 소원을 간단하게 믿음, 사랑, 평화로 정했습니다. 첫째로는 지속적인 믿음을, 두 번째는 사랑을 줄 줄 알고, 또 사랑을 아는 넓은 가슴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주위의 평화를 구했습니다.
세례가 무사히 끝나갈 무렵, 제단이 훤히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 성당 제단의 조명량은 일정합니다. 미사가 끝났다고 조도를 밝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저 착각일까, 아니면 이 것이 흔히 말하는 '간증'인가? 세례식 내내 마음이 벅참을 느꼈지만, 시각적인 환경의 변화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세례를 받은 새 신자 모두를 일어서게 하시고, 뒤로 돌아 교우분들께 인사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교우들이 박수와 환호로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이 날은 유난히 많은 이들이 함께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새 신자를 축하하기 위해 세례식에 동행한 가족이나 지인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오직 대부 한분만 있었습니다. 가족 모르게 다닌 성당이라 가족을 초대하지 못했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이 예식에 꼭 함께하길 바란 이는 있었지만 알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 예식을 지켜보고 믿음을 증명해 줄 대부 한 분이면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식을 무사히 마치고 모두 제단 앞에 나와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새 신자들에게 안긴 꽃다발들이 이 예식이 얼마나 중요하고 기쁜 일인지를 증명했습니다. 저는 꽃다발이 없었습니다. 미처 무언가 선물을 준비 못했다고 무척 미안해하는 대부님. 저는 오히려 대부님께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고, 걸음 해주신 것 만으로 너무 감사드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사진을 찍기 위해 저는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열넷 새 신자들 사이에 섰습니다. 제단 앞에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내려오다가, 문득 위를 바라보니 그제야 제단이 밝아졌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성당 2층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빛이 미사가 끝날 무렵 마침 하늘의 구름이 걷히며 더 밝아진 것이었습니다. 빛은 수시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꽃다발이 없으니 빛을 한가득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저의 편지에 대한 답을 빛으로 주시느라 세속의 꽃을 주지 않으신 걸까요.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마태 6:28, 29)
"우리 미카엘,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미사를 마치고 본당을 나와 성전 마당에서 뵌 수녀님은 제 손을 꼭 잡으며 편지를 읽고 감동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세례명으로 저를 불러 주셨습니다. 추운 날씨지만 따스함이 온 마음에 스몄습니다.
12월 15일 일요일은 제게 그야말로 holy day, 구약에서 모세가 제정한 영광의 휴일 그 자체였습니다. 사실 그 직전 9일의 기도를 하면서도, 하루를 쉬기 위해 해야 할 '열심히 산 6일의 의무'를 소홀히 한 것 같아 조금 죄송스럽긴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테스터먼트: 모세>에서 소개한 모세의 일대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해 탈출하고, 하느님의 이끄심대로 여정을 시작하지만 끝내 자신은 '약속의 땅'에 닿지 못합니다. 그래도 후손들은 결국 약속의 땅에서 자손들과 번성하게 됩니다.
세례 이후를 말씀하시며 '스스로가 굳게 지켜야 할 믿음'을 강조하신 주임 신부님. 그 말씀대로 세례식까지의 과정보다 그 이후가 더 중요한 새 신자로써의 삶을 살며 영광을 얻고, 또 전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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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 이야기를 들은 한 친구가 하루 뒤 제게 꽃다발을 선물했습니다. 빛다발도 좋지만, 역시 꽃다발은 받으면 참 기분이 좋아집니다. 의외의 선물에 생일의 기쁨을 하루 더 연장해 이어가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