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산에서 마신 따뜻한 코코아 라테
눈 오는 흐린 날에도 성전 성모의 상 주위는 여전히 온화하고 밝습니다.
서울 남서쪽과 과천, 안양의 경계에 자리한 관악산은 높지는 않지만, 바위가 많고 험해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닙니다. 정상에는 하늘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서 기도하고자 하는 이들이 찾는 연주암과 연주대가 있습니다. 저도 새해를 맞아 관악산을 올랐습니다. 그곳에서, 가족의 건강과 화목을 함께한 이들과 빌었습니다.
관악산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은 할아버지입니다. 거친 산길에서 어린 손자를 이끌고 보호해 주시던 든든한 수호자 같았던 분. 제 기억 속 첫 산행도 할아버지와 함께한 관악산이었고, 이후에도 자주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신 후, 발길이 뜸해졌습니다. 가끔 찾더라도 변함없는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묵묵히 서 있고, 변하는 것은 나약한 사람의 마음뿐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제게 관악산은 여전히 ‘할아버지의 산’입니다.
그리고 관악산은 어머니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특히 과천청사에서 연주대로 오르는 길은 평생 ‘산’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셨던 어머니의 모성이 오롯이 스며 있는 길입니다. 추운 한 겨울, 할아버지와 함께 산에 올라 연주암 객사에 잠시 머물 때였습니다. 어린 남동생이 뜨끈한 구들에서 자다가 그만 바지에 실례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집으로 연락을 하셨고, 해가 지기 전에 내려가야 했기에 그대로 동생을 둘러업고 산을 급히 내려가셨습니다. 산 중턱쯤이었을까, 일행은 어머니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허술한 일상화를 신은 채, 오직 자식 걱정뿐인 마음으로 마른 옷가지를 챙겨 거친 겨울 산을 오르신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의미는 지난 1월 1일 성당에서 새겼습니다. 매 년 새해의 첫날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전 세계에서 공통으로 편찬하고, 같은 날 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매일미사(한국천주교주교회의 발행)'에는 이 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는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이다. (중략) 또한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 1968년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심에 따라 교회는 이후 해마다 이를 기념하고 있다.
어느 지역, 어느 성당을 가든 입구에는 성모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모상은 성전에 들어서며 가장 먼저 고개 숙여 공경을 표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천주교를 ‘성모를 섬기는 종교’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하느님과 같은 섬김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 성령 다음으로 공경받는 성인으로서, 예수님과 함께 존경과 기도의 대상으로 모셔집니다.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성모송〉에는 이러한 의미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이처럼 우리는 기도 속에서 성모님께 우리를 위해 빌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는 성모님이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교회의 어머니,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공경받기 때문입니다.
✢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45)
여러 민족의 신화 속 어머니는 생명과 풍요의 상징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나 자라는 동안 받은 그 은혜를, 정작 성장하면서는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엄격한 훈육을 곡해하여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말씀은 강해 보였지만 그 마음은 한없이 여리고 따뜻했습니다. 속으로는 두려워하면서도, 자녀를 지키기 위해 거센 외풍에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강인한 존재이셨습니다.
추운 겨울, 따뜻한 코코아에 풍성한 우유 거품을 얹어 마시면 몸의 냉기가 사라지고, 영혼까지 따스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나는 주로 산행에서는 가볍게 물만 챙기는 편이었지만, 함께한 이들이 늘 과일과 과자를 챙겨 오는 정성을 받아 왔습니다. 이번에는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어 뜨거운 물과 데운 우유, 그리고 휴대용 우유 거품기를 챙겼습니다.
산 중턱쯤 자리를 잡고, 종이컵에 코코아 가루와 뜨거운 물을 섞은 뒤, 보온병에 담아 온 데운 우유에 거품기를 넣어 저었습니다. 물은 충분히 뜨거웠고, 우유도 온기를 잃지 않았지만, 아쉽게도 거품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끓이는 과정에서 온도가 너무 높았던 탓에 유지방이 분해되며 더 이상 거품이 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맛이 좋으니 그걸로 됐어. 고마워.”
함께한 친구는 정성이 담긴 노력에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조금 서툴러도, 누군가를 위해 준비하는 그 과정 자체도 사람을 감동시키는데, 분명 모든 일이 인생에 처음이고 어려웠을 텐데도 꿋꿋이 가족이 평화롭도록 돌본 어머니의 큰 은혜는 어찌 모르고 살아왔을까요.
대충 큰 곰을 보고는 '와 크다'하지만, 정작 지구는 그 커다란 존재를 우리가 대체로 잊고 사는 것과 같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