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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습

, 그리고 라테 in '노트르담 드 카페'

by 케니스트리

아이처럼 말하고 생각했다면 온전한 사랑이 전해졌을까요? 고통을 감내할 어른스러움도, 아이 같은 순수함도 있다고 할 수 없는 지금,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더 모르겠습니다. 그저 앞선 지혜로운이들이 각자의 언어로 한 사랑 이야기에서 그 생김을 어렴풋 그려볼 뿐입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코린토 13,11)




사랑의 조건


렘브란트는 그림 '탕자의 귀향'에서 성경의 비유 중 하나인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그림의 주제는 아버지의 자애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쓰인 도구는 붓과 캔버스, 유화 채색이었지만 세세한 인물 배치와 설정, 그리고 빛의 표현으로 그 의미를 완성했습니다.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Rembrandt


'빛의 화가'라 불린 렘브란트는 빛으로, 한 없이 자비로운 아버지를 표현합니다. 아버지의 얼굴은 다른 인물들에 비해 더욱 밝습니다.


무릎을 꿇은 이는 아버지의 둘째 아들입니다. 아버지께 요구해 얻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꼴로 배를 곯으며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배가 고파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발견하고 달려와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환대합니다. 이 장면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이는 첫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도우며 종처럼 일했어도 자신에게는 염소 한 마리 잡아 치하한 적이 없는 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은 반기며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것에 화가 잔뜩 났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네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1, 32)'고 큰 아들을 달랩니다.


그림 속 아버지의 표정에는 그리움에서 비롯된 자애의 빛이 가득합니다. 그 어떤 조건도 바람도 없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제대로 살았다고 생각되는 순간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순간뿐이다'


얼마 전 접한 헨리 드러먼드(Henry Drummond)의 문장으로부터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비록 저는 헨리 드러먼드의 문장에서 '사랑한 순간'을 떠올리며 공감했지만, 사실 살면서 가장 잘하지 못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마치 사랑학 박사라도 된 것처럼 사랑에 대해 온갖 예쁜 말을 늘어놓았지만, 실상은 그것을 잘 모른 채 미숙하고 모난 모습으로 사랑을 흉내만 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글: Spirit of Love)




사랑이란


언젠가 사랑하는 이에게 썼던 편지 중 일부입니다.


'나는 좀 아파도 그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좀 수고스럽더라도 그는 편안했으면 좋겠다, 나는 좀 배가 고파도 그는 굶지 않았으면 좋겠다…’와 같은. 어여삐 여기는 마음만 가진다고 사랑이 아니고, 이처럼 상대를 내 몸처럼, 내 의식의 일부처럼 여기고 돌보고 살피는 마음이 더해져야 완전한 사랑인 것 같아.'


자비(慈悲), 즉 어여삐 여기는 마음인 자(慈)와 가엾게 여기는 마음인 비(悲)를 합한 단어입니다. 편지에서, 저는 혜인스님의 사랑론을 인용했습니다. 혜인스님은 사랑은 곧 자비요, 자비는 상대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 즉 나를 내려놓고 상대가 더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딱 그런 마음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울 때는 나의 모든 것을 내어줄 것처럼 사랑한다 했지만, 그리움이 사라지자 사랑도 흐릿해짐을 겪었습니다.


사랑이 원래 그런 걸까요? 아니면, 사랑은 위대하나 사람이 나약했던 걸까요. 신약 성경의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서간'에서 사도 바오로는 사랑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코린토1 13,4-8)


어리석은 이의 사랑에는 사도 바오로가 전한 모습들 중 일부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축복을 얻었고, 서로 사랑할 행운도 있었지만, 교만했고, 앙심을 품었고, 견디는 인내도 없던 이는, 마땅하게 사랑을 잃었습니다.


사랑을 이야기한 사도 바오로의 편지는 이렇게 맺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코린토1 13,13)


한신대 논문 <바울 신학 이해를 위한 소고>에 의하면, 믿음은 과거로부터 기인하고, 희망은 미래를 가리키지만, 사랑은 이 모두가 필요한 현재의 가치라는 점에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제일이라고 했습니다.




노트르담 드 카페


'노트르담 드 카페'는 우리 성당에서 운영하는 카페입니다. 커피가 맛있고 드는 빛이 좋아 자주 들르던 곳이었습니다. 저의 신앙도 이곳에서 시작됐습니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자연광이 은근히 밝힌 따뜻한 카페에서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미사에 나올 마음이 든 것이 그 처음입니다.


카페는 봉사자분들이 운영하고, 운영 수익금은 전액 불우이웃을 위해 쓰인다고 합니다.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헌신, 나아가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라테를 주문하곤 했습니다. 새 신자가 된 지금, 저도 성당의 은혜에 보답할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감사한 기회로 카페에서 봉사하게 됐습니다.


첫날, 오랜만에 라테를 만들어 봤습니다. 바리스타 공부를 하며 카푸치노만큼은 제대로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오랜 일이라 그런지 이번 라테는 모양과 맛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도 따뜻했습니다. 카페 식구들의 두 팔 벌린 환대가 엉망인 라테에도 미소 짓게 했습니다.


그럴듯한 수식어가 사랑을 설명하지 못하듯, 이 라테가 따뜻한건 모양과 맛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가을 어느 날 '노트르담 드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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