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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페이지

,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by 케니스트리

오늘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글의 연재가 스무 번째 되는 날이고, 서른 번의 주일에 이어진 천주교 교리반 수업이 비로소 끝난 날입니다. 그렇게 아쉽도록 무거웠던 교리 교재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날이고, 첫 고해로써 진정한 천주교 신자로 거듭난 첫날이기도 합니다.


교리 교재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의 뒷면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내게 아르스로 가는 길을 알려주렴.
그럼 나는 너에게 천국 가는 길을 알려줄게.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 부임한 비안네 신부가 길을 잃고 헤맬 때, 우연히 만난 소년에게 건네신 말씀입니다. 이로써 교리 공부의 끝은 또한 새로운 시작임을 알았습니다.




행복의 조건


"정말 화가 나서 못살겠어. 도대체 걔는 왜 그러는지, 그런 부당한 일에도 말 한마디 못 하고, 오히려 자기 탓을 하더라니까."


눈매가 무섭게 바뀔 정도로 화를 내며 말하는 이는 오랜 지인이고, 주제의 대상은 제 친구이자 화자의 연인입니다. 운동 센터의 일방적인 수업 취소와 통보가 있었는데, 거기에 제대로 대응도 안 하고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 남자친구가 너무 답답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괜찮아. 내가 요즘 많이 빠졌고, 가기로 한 전날 미리 확인하지 못한 내 잘못이야.' 이게 그 친구의 답이더랍니다. 그 친구다운 말입니다. 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걔가 우리들 중 제일 행복하네, 웬만한 일에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


그러자 동석한 다른 이들도 공감을 했습니다. '맞네, 맞아.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화 풀어.' 물론, 답답함의 크기는 연인을 아끼는 마음만큼 이겠지요. 그 또한 사랑의 산물이니, 그걸 무기로 세상의 부당함에 맞서더라도 서로를 미워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마태 6,1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입구에서


어느 날 친구가 불교 경전인 '법구경'의 구절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누군가와 다툼이 생길 것 같으면
그 순간, 반드시 떠올려 보세요.
당신도, 상대방도 이윽고 죽어서
이곳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결국엔 당신도 사라진다. 나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아무려면 어떤가.'

화를 털어버리고 잔잔한 마음을 되찾기를.


참 맞는 말입니다. 언젠가 다 사라질 육신, 관념, 옳다고 믿었던 착각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의 현상이 부당하고 서운하다고 그 감정에 매몰된 다툼이 다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아침에 운전을 하다 보면, 모두 똑같이 바쁜데 꼭 얌체처럼 끼어들며 교통 정체를 일으키는 차가 있습니다. 화가 나 그 차에게 어떻게든 보복을 하고 싶은데, 분풀이를 한다고 얻을 이득이 없으니 그냥 참습니다. 그러면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그 일은 기억에 한 톨도 남지 않고 사라지게 됩니다.


보물이 있는 곳


✝︎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19-21)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누군가와의 다툼이나 그로 인한 불쾌한 감정만은 아닙니다. 마치 영원할 것처럼 원하고 집착하고 쌓고 지키려는 유무형의 보물들, 이를테면 돈, 물건, 외모, 자존심, 체면과 같은 것들 때문에 우리는 지옥에 살고 있습니다. 진실은, 이 모든 것들 또한 우리와 같이 곧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 내가 세상의 순리로부터 잠시 빌려 쓰지 않는 것이 없는데, 감사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영원히 소유하려 드니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음에도, 얻은 것을 잃고 나면 그 상실감은 너무도 큽니다. 그게 일상이고, 상식이고,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흐름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덕을 하늘에 쌓으라는 가르침은 사실 지키며 살기 참 어렵습니다.


다행히도 성경을 알고부터는, '생각의 전환'만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며 말씀의 가치를 체감하곤 합니다. 마음을 둘 곳은 저 멀리, 또 가까이 있습니다.


민들레(dandelion)의 꽃말은 '행복'과 '감사'


✝︎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마태 6,28-29)


내면의 보물이 내면의 부귀와 평화를 가져다 준다는 가르침을 오늘도 새깁니다.




마지막 페이지


저는 요즘 성경 필사를 다시 하고 있습니다. 4복음서 중 첫 번째인 <마태오 복음서>를, 매일 저녁에 짧게는 10분, 또는 30분 정도 노트에 적습니다. 나만의 성경책을 만드는 이 시간은 제게 매일의 쉼이자 여행입니다. 세례를 받기 위한 과정에서 <마르코 복음서>를 베껴 쓸 때와 다르게 목표한 날이 없으니, 그저 스스로를 위해 한 자 한 자 정성껏 적으며 새기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일기처럼 써온 편지도 마지막 페이지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모든 소중한 것들을 잊고 싶지 않아 계속 써 내려간 이야기를 더는 읽는 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끝맺지 못한 편지는, 마치 닿지 않을지 몰라도 그리움에 하늘에 계실 할머니, 할아버지께 말하듯 건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쓰는 이가 곧 작가이자 독자인 셈인 그 편지에 마침표를 찍어도, 그 이야기를 온전히 맺을 자신이 아직 없기는 합니다. 그러니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도 또 다른 시작이고, 언제 어느 장을 펼쳐도 맑은 샘처럼 복음이 넘치는 성경을 조금 더 가까이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을 통해, 또 그 제자들과 성인들을 통해 전하고자 한 하늘의 편지 성경은 수신인이 우리 모두입니다.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은,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며 온전히 그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루카는 복음서 서두에 이렇게 적습니다.


✝︎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루카 1,1-4)


테오필로스(Theophilus)는 그리스어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해설은, 테오필로스는 특정인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새기며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 모두를 의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이 글은 복음서의 내용이 진실이라는 작가의 선언입니다. 작가는 그것을 새길 독자들이 행복의 길을 걷고, 하나 된 믿음을 갖기를 소망하며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오늘 주임신부님께서는 강론에서, 성경이 비로소 살아 숨 쉴 때는 믿음이 있는 우리들이 읽어 그 의미를 바로 새기고 실천할 때 라고 하셨습니다.


이야기를 잘 맺는 일은 언제나 우리들 몫입니다.



<카페 드 바이블>을 마치며, 기운 달 같은 글에도 공감하시어 이야기를 이어갈 힘을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한 동안 소중한 대화와, 묵상과, 기도의 경험을 이어가며 다음 이야기를 준비하려 합니다. 더 성숙한 두 번째 성경 속 이야기 가지고 다시 카페의 문 열겠습니다.


해 뜨기 전 이른 아침 집 앞에서



표지 사진: Unsplash의 Markus Spis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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