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한 소통
소통에 대해 고민하다가 매거진을 기획했고, 담을 그릇이 생기자 그 안에 채울 콘텐츠를 떠올렸던 것처럼. 맛있는 차를 사니 이야기를 나눌 동료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진정성 있는 대화의 시작이 되었다.
이처럼 ‘차 한잔’은 수단이었고, 대화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격식 없는 대화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의외로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직장인이 하루 감당할 수 있는 예산 안에서 점심 식사와 커피 세 잔은 허용 가능한 최대한의 사치였다.
마케팅을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다. 소통이 곧 발전과 확장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케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새로운 환경에서도 소통은 쉽지 않았다.
당시 내가 이직한 곳은 창업 5년 차의 스타트업이었다. 안정된 환경에서 일하다가 스타트업에 처음 발을 들이니 모든 것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 중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이 참 답답했다.
내부에서는 ‘오버 커뮤니케이션(over communication)’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창업자와 초창기 멤버들 사이에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었고, 조직이 성장하며 새로 유입된 경력직들은 자연스럽게 소외되곤 했다. 그간의 성공 방정식에 심취한 기존 멤버들은 문제 풀이의 다른 접근법을 인정하지 못했다. 새로운 구성원의 의견은 기존 리더층과의 간극 속에서 충분히 반영되기 어려웠고, 조직은 미묘한 이중 구조 속에서 흔들렸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틀린 것에는 눈을 감고, 호기심을 접어두고 원만하게만 지내면 마음이 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만약 타성에 젖어 적당히 타협해 버린다면, 발전의 방향을 잃고 정처 없이 헤매게 될 것 같았다. 추진력이 바닥나면 결국 나도, 조직도 멈춰버릴 것이 분명했다. 변화 속에서 추진력이 생긴다고 믿었지만, 변화는 언제나 좌절을 동반했다. 그래도 처음 가졌던 생각대로, 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의 마음을 열고 다양한 생각을 듣고 이해하는 작은 시도부터 해보기로 했다.
새로운 직원으로서 다가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스타트업의 젊은 동료들은 열정이 넘쳤지만, 왠지 모르게 깊이가 부족한 느낌이었고, 새로운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어딘가 경직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유연함이 부족했다. 어쩌다 대화의 기회가 찾아와도 그들의 지나친 효율 추구 방식이 오히려 벽처럼 느껴졌다. 따뜻한 커피 한잔에서 시작하는 환담이 닫힌 마음을 여는 좋은 수단이었지만, 매번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사는 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차와 종이컵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100잔 분량의 차와 종이컵 가격이 일반 카페라테 여섯 잔의 가격이었다.
우선 내 자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티-토크(tea talk)를 제안했다. 따뜻한 차 한잔으로 시작하는 대화는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편안했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대화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조금씩, 동료들은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설득하려면 이성보다 관심(interest)을 이끌어야 한다'라고 했고, GE의 전 CEO 잭 웰치(Jack Welch)는 '최고의 회의는 회의처럼 느껴지지 않는 회의'라고 말했다. 여러 번의 차담을 동료들과 나누며, 그들의 말이 옳았음을 알았다.
그렇게 책상 서랍을 티백과 종이컵으로 가득 채워놓고 함께 마실 사람을 찾아 나섰다. 서랍이 무거울수록 마음도 든든했다. 따뜻한 찻물에서 피어나는 수증기가 서로의 냉기를 녹여, 함께하는 시간이 조금 더 포근해지기를 기대한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