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자산, 비울 때와 채울 때
아이가 해외 명품 브랜드 옷을 입은 걸 보고 그 부모인 친구에게 물었다. 중고라도 가격은 웬만한 아동복 브랜드의 새 제품보다 몇 배는 비싼 정품이라고 했다. 마침 ‘아이 키우느라 돈 들어갈 데가 많아 맞벌이를 해도 생활이 빠듯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라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영유아를 위한 명품 소비가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육아 뿐만이 아니다. 한 때는 '영끌'이 유행이더니, 요즘엔 SNS 중심으로 '플렉스(Flex)'라는 소비 과시가 마른 날 들불 처럼 번지고 있다. 그런 소식을 접할 때면 경기 침체는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가 싶어진다. 부쩍 오른 물가에 소비를 줄이고, 최근에는 저축과 건강을 위해 도시락을 싸 다니는 직장인으로서, 생활이 여유롭지 않다면서도 아이에게 만큼은 명품 옷을 입히고 싶어 하는 부모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법무법인 태평양은 예술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고가의 그림부터 오랜 시간이 더해진 가치 있는 가구까지, 오피스 인테리어의 일부인 이 작품들은 외부인의 눈에는 사치처럼 보일 수도 있다. 태평양의 예술작품들은 단순한 부의 과시일까, 방문객을 위한 감성적 배려일까?
태평양을 대표하는 작품은 대회의실에 걸린 브라이언트 오스틴의 밍크고래가 대표적이다. 한 매거진 기사에서는, 태평양의 예술작품들이 ‘생각이 복잡한 의뢰인들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의 안식을 주기 위한 의미’가 있다고 소개했다. 그 의미를 바로 알 수는 없어도, 태평양의 예술작품에는 '낭비'나 '과시'라는 표현이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무엇이 하나를 사치로, 또 다른 하나를 품격으로 만드는 걸까? 명품을 입은 어린아이와 태평양의 예술작품을 떠올리며, 기업의 이미지 제고와 원활한 채용을 위해 문화 브랜딩에 공을 들이는 스타트업들의 사례도 떠올랐다.
웰컴키트(Welcome Kit)는 조직 문화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기업들은 브랜딩과 직무 만족도를 차별화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다양한 웰컴키트를 제작해 제공한다. 보통 사무용품, 캐릭터 굿즈, 생활용품 등이 포함되는데,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화려하기만 하고 실용성이 떨어지는 제품도 종종 눈에 띈다.
웰컴키트에 포함된 제품 중에서는 볼펜, 다이어리, 캡슐커피세트, 슬리퍼처럼 사무실에서 소모적으로 사용되는 것들이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비용을 아끼려다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들로 구색만 맞춘 경우에는 차라리 만들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조직 문화를 브랜딩 하고 내부 소통을 강화하기 위한 이벤트도 마찬가지다. 경험상, 많은 비용을 들였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적은 예산으로도 기획이 참신하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행사에서 터무니없이 적은 예산만 배정하는 대표도 있었고, ‘돈을 아끼지 말라’는 대표도 있었다. 하지만 돈을 많이 들인 이벤트가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벤트의 성패는 기획의 문제지 돈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아무리 감성적이고 철학적인 이유를 내세워도, 조직문화의 궁극적인 목적이 결국 기업 운영상 실익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기업은 내부적으로 직원들의 의욕을 높이고, 외부적으로 긍정적인 인식을 구축하며, 브랜드 가치를 강화하기 위해 문화적 요소를 고민한다. 대부분의 경영자는 ‘좋은 문화를 가진 회사’로 인정받길 원하고, 그것이 곧 기업의 경쟁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문화의 가치는 한쪽으로 기울어 균형을 잃은 어린아이의 명품 옷이 아니라, 태평양에 걸린 밍크고래 그림과 더 가까운 모습이지 않을까.
절약에 전전긍긍하느니, 차라리 ‘소비를 하지 않음’이 더 현명하다는 말이 있다. 그래도 절약이 낭비보다는 낫다. 사업의 명운에 따라 좌우되는 문화 기획이 길어야 한두 해 입힐 어린아이의 명품 옷과 다를 바 없다면, 차라리 여백으로 두자. 직원들의 인식, 상호 존중하는 문화, 배려의 습관 같은 소프트한 요소들의 개선에 집중하다 보면, 형편이 나아졌을 때 신중히 선택한 아름다운 것들로 문화의 아쉬운 빈틈을 채울 좋은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조직문화 기획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언제,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선택이다. 너무 이른 시점에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문화를 만들면 과시로 비칠 수 있고, 늦어지면 조직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문화적 기반을 놓칠 수 있다. 따라서, 문화적 투자는 조직의 단계와 필요에 맞게 예산을 기획해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단계 전반을 통틀어 '정성'은 꼭 들이면 좋겠다.
직원을 위한 문화 기획의 핵심은 보여주기가 아니라 실질적인 경험이다. 웰컴키트든, 사내 행사든, 오피스 공간이든 중요한 것은 직원들의 경험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조직의 정체성을 어떻게 반영하는가다. 좋은 문화는 단기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가치를 쌓아가는 자산이어야 한다.
태평양의 예술작품이 좋은 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의뢰인에게는 배려로, 내부 직원에게는 휴식의 공간으로, 기업에는 브랜드 가치로 작용한다. 신중하게 선택한 문화적 자산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의미를 더하며, 굳이 홍보하지 않아도 직원과 외부인들이 자연스럽게 기억하고 확산시킨다. 조직문화란 그렇게 내재화될 때, 진정한 힘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