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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마케팅 나무 - ep.1

by 케니스트리

“샘플이 준비되지 않으면 촬영 자체를 미뤄야 해요. 다음 주 수요일까지는 어떻게든 나와야 하는데... 이제 와서 공장 사정이라뇨?” 말투가 점점 격앙되어 갔다.


“신제품 양산도 늦어질 판이야. 나도 머리가 아파. 업체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에어백 내피에 문제가 있다’며 확인하겠다고만 하고…”


개발실장은 새로 출시될 제품의 실사 촬영을 위해 시제품을 이번 주까지 준비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금요일, 한 주의 끝자락에 그는 ‘공장 사정’이라는 말과 함께 출고 지연 소식을 전해왔다.


주말이 지나고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수요일 촬영 일정은 사실상 물 건너가는 셈이다. 배송까지 포함하면 시간은 빠듯했고, 이미 섭외된 스튜디오와 모델, 촬영팀의 스케줄은 조정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실장님,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다음 주 화요일까지 해결이 안 되면… 곤란해져요.”


“공장 쪽 사정이라… 아무튼 한 번 더 연락해 볼게. 근데 그 담당자가 전화를 잘 안 받아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 ‘이번 주엔 나온다’고 확인받았는데,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다. 스스로 여유 없는 일정이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사정도 있었다. 그때 문득, 하나 떠오른 생각.


“실장님, 시제품 문제... 내피에서 공기가 새는 거잖아요? 촬영용이라면 꼭 공기로 채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안에 솜 같은 걸 넣어서 모양만 잡으면 되지 않을까요?”


“….”


잠시 고민하던 실장님, 이내 얼굴을 환하게 핀다.


“그거 괜찮다! 월요일까지도 안 되면, 화요일까지 현재 상태로 보내달라고 할게. 그 정도는 여기서도 되지.”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로 돌아왔다.


‘체크 리스트—시제품 구비 완료’.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리고 조금 후, 자리를 비웠던 팀장님이 돌아왔다. 하필 이럴 때 자리를 비우더니.


“팀장님, 시제품 내피 품질 문제로 월요일 출고가 어렵다는데요. 대신 방법을 찾았어요.”


“뭔데요?”


“부푼 모양만 잘 표현되면 되잖아요? 꼭 에어를 넣지 않아도, 안에 솜을 넣으면 해결이 될 것 같아서, 제품개발 실장님께 부탁드렸어요.”


팀장님은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대로 잠시 멈춤. 불안했다. 내 아이디어에 문제가 있나?


“그래도 최대한 정상 품질로 받도록 해보세요. 필요하면 퀵이나 직접 픽업으로 배송기간을 줄일 수도 있어요. 요즘 보정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실제로 에어가 찬 제품과는 표면의 매끈함이나 압축됐을 때 풍선효과가 다를 수 있어요. 월요일까지 어렵다면, 그땐 매니저님 아이디어대로 가죠.”


‘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좋은 원본에서 좋은 보정이 나온다는 기본을. 그러고도 ‘해결했다’고 뿌듯해하고 있었다니.


“그래도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네요. 매니저님, 마케터 다 됐네요?”


'슬며시' 웃으며 말하는 팀장님. 병 주고 약 주는 건, 여전하네.


그래도, 그 말이 맞다. ‘이런 것도 마케팅 일이야?’라며 온갖 예상 밖의 업무에 정신없었던 처음에 비하면, 지난 1년 하고 두 달 동안 나, 확실히 변했다. 아니, 바뀌었다. 경영지원팀에서 얌전히 일하던 내가, 지금은 영업사원인지, 디자이너인지, 생산 관리직인지 모를 직무 경계가 흐릿한 일을 하면서도—여전히 팀장님에게 그럴듯한 이유로 설득당하는 난, 마케터다.


그리고 내 삶의 변화는, 그날 시작됐다.




마케팅팀


"마케팅팀이 생긴다고? 영업 본부장이 겸직하던 일 아닌가?"


내가 묻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 들이키더니 명화가 말했다.


"그건 회사 IR* 자료에 필요하니까 CMO 겸직이라고 구색만 갖춘 거지. 이번에 마케팅 팀장도 새로 온다던데? 우선 영업본부 아래에 둘 건가 봐"


커피 메이트로 친한 동갑내기 명화. 명화는 인사팀에서 일한다. 우리 둘은 대화가 잘 통해서 자주 커피를 사들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자주 명화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들었다.


난 명화 덕분에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빠르게 전해 듣곤 한다. 호기심이 많은 성격에, 명화와 주고받을 이야기는 늘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도, 이번에 새로 생긴다는 팀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마케팅 팀은 무슨 일을 하려나? 자금 나가는 것 보면, 이 팀 저 팀에서 제작비니 광고비니, 지출도 꽤 많던데.' 잠시 궁금함에 사로잡혔다가, 머리를 흔들며 생각에서 벗어났다. 사실 지금은, 다른 팀 사정에 마음 둘 여유 같은 게 별로 없는 상황이다.


"그나저나 나, 요즘 고민이 있어. 팀장이 나 좀 미워하는 것 같아. 왜 그런 것 있잖아. 눈을 잘 안 보고, 대화를 피하고. 최근에는, 팀 업무에서도 제외하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


푸념하듯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느낌, 그다음에는 확신으로 이어진, 그간의 사정을.


"무슨 일이래. 그거 직장 내 괴롭힘 비슷한 거 아냐? 너처럼 열심히 하는 애가 어디 있다고"


명화는 눈을 크게 뜨더니, 조금 과도한 정도로 반응해 주었다. 언제나 명화의 이런 반응은 기분전환이 된다. 물론, 이런 기분 상태가 영원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IR(Investor Relations, 투자자 관계): 기업이 투자자에게 회사의 재무 상태나 비전을 알리고 신뢰를 쌓는 활동. IR자료는 해당 활동을 위해 정리된 여러 형태의 문서. 일반적으로 회사의 경영 실태와 조직 현황, 미래 비전이 담긴다.



미지의 위기


첫 회사는 젊은 대표가 창업한 스타트업이었다. 투자 유치며 신기술 개발, 업무 협약 체결 소식이 매주 인터넷 신문에 게재됐다. 하지만 매체 속 화려함과 달리, 실상은 달랐다. 실적은 부풀려졌고, 전사 회의에서의 말들은 일종의 쇼(show)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됐다.


퇴사자가 유독 많은 이유를 처음엔 알지 못했다. 신입으로서 '각오'를 말하고 '응원'을 바랐던 나를 동료들이 왜 그런 표정으로 바라봤는지 이해하게 됐을 무렵, 이미 이별은 일상이 되어 있었다. 자찬만을 일삼으며 귀를 닫아버린 경영진에 대한 불신은 조직의 표정을 없앴다. 시류에 따라, 결국 그 회사를 떠나게 됐다. 좋은 동료들을 만났고, 아직도 이어지는 그들과의 인연이 회사에서 얻은 유일한 선물이다.


두 번째로 입사한 이곳은, 업력 10년이 조금 안된 중소기업이다. 나라로부터 인증받은 기술도 있었고, 초기 출시 제품의 가치가 시장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었다. 회사의 경영은 안정적이라 평가받는다. 이 회사에 기쁘게 입사해 다닌 지도 어느덧 8개월이 지났다. 적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이 문제가 될 줄이야.


어느 날부터 절차나 방식에 개선이 필요한 것들이 보였고, 자연스럽게 제안을 했다. 이전에 일하던 회사에서는 그런 게 당연한 분위기였다. 흉내만 내는 수준이어도, 모두 성공한 스타트업의 일 하는 모습이라며 따랐다. 그런데 이 조직은 달랐다. 적극적으로 내는 의견에 팀장은, 아니 팀은 처음엔 공감하는 듯 보였지만, 바뀌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불편한 건 불편하다고 말했고, 필요한 건 필요하다고 했다. '왜'가 궁금했고, '어떻게'를 제안했다.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나서서 정리했고, 내 업무가 아니라도 여유가 있으면 돕고자 했다. 그날도 그런, 나의 일상이었다.


"그건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냐"라며, 팀장은 급기야 나의 제안에 핀잔처럼 들리는 거절로 답했다. 피로해진 것일까? 그땐 미처 깨닫지 못했다. '더는 나서지 마'라는, 비적극의 유도이자, 그의 언어로 한 최선의 '경고'였다.


이후에는 왠지 내가 업무에서 배제된다고 느꼈다. 팀장은 다른 팀원들에게만 주로 묻거나 지시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조금씩, 조직에서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확신했다. 여기에 있으면, 내가 시들어 죽고 말 거라고.




'미지의 마케팅 나무'를 연재하며.

마케팅이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광고를 먼저 떠올립니다. 기업의 경영자라면 대부분 마케팅의 성과가 눈에 보이길 원하죠.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말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중요한 마케팅 활동이 있고, 겉으론 꼭 필요해 보여도 실은 불필요한 소모에 불과한 일도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도 있고, 빨리 끝내야 할 일도 있죠.

이 책은 마케팅 개념을 정리하거나 설명하는 책이 아닙니다. 자기계발서도 아닙니다. 저자는 다양한 기업에서 마케팅을 기획하고 실행하며, 이 일이 단순한 홍보나 판매 촉진이 아닌 목적과 개념, 관계와 과정, 그리고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들까지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글은 그런 체험을 기반으로 창작된 소설입니다.

우리는 이 소설 속 주인공, 아무런 경험도 지식도 없이 마케팅이라는 낯선 세계에 던져진 '미지'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미지가 마주하는 현실은, 중소 제조업의 마케팅입니다. 자원도 자본도 넉넉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적응하며 생존하는, 익숙한 우리들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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