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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세계로

미지의 마케팅 나무 - ep.4

by 케니스트리

“마케팅팀이요?”


팀장님은 잠시 말을 멈췄고, 나는 멍한 기분이 들었다.


‘마케팅?’ 당혹스러웠다.


“네. 마케팅팀이 새로 생기는데, 매니저님을 추천할까 했어요.”


“그런데 저는 마케팅은 해본 적도 없고... 잘 몰라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마케팅 팀장님으로 오실 분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거든요.”


팀장님은 시계를 슬쩍 보더니 잔을 쟁반 위에 올리고, 노트를 챙기며 말했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제가 잠시 후에 면접이 하나 있어서요. 우리 이동하면서 이야기할까요?”


“아, 네. 좋아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흘렀구나. 자리에서 일어나 정리하고 있는데, 인사팀장님은 어느새 쟁반을 들고 있었다. ‘RETURN’이라고 쓰인 곳에 쟁반을 가져다 두고는 “가시죠.” 하며 입구로 향했다.


자리에서 출입구까지, 팀장님을 따라나서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잔잔한 흥분은 이어졌다.


‘본부장님의 제안일까? 인사팀장님의 아이디어일까? 우리 팀장님도 이 사실을 알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들이 이어졌다.


“이번에 오시는 팀장님은 이달 말부터 출근하시기로 했어요. 우선 팀원은 두 명을 내부에서 충원할 예정이에요. 안 그래도 영업팀, 인사팀, 디자인실까지 쭉 살펴보며 검토 중이었거든요.”


인사팀장님은 걸음을 옮기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저도 마케팅이라는 일을 잘 아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 회사에서 우선 바라는 마케팅의 업무 방향은 회사 브랜드를 알리고, 홈페이지며 영업자료 같은 것들을 관리하는 일이 포함될 거예요. 전반적으로 기획과 관리가 필요할 테고, 창의성도 분명 중요하겠죠. 매니저님이라면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대충 개념은 알겠어도,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마케팅 팀장님 입사가 결정되고 새로 생기는 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때 여쭤봤거든요. 팀원으로 어떤 역량이 요구되는지를요. 그랬더니…”


‘그랬더니?’


“‘이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있고, 호기심 많은 성격이면 다 괜찮다’고 하셨어요. '진정성' 이야기를 하시던데요?”


"진정성요?"


평소 잘 쓰지 않고 들어본 적도 없지만 왠지 고전적인 이미지의 그 단어. '진정성'. 마케팅 팀장님은, 엄청 진지한 사람인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팀장님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1층으로 내려와 회사 건물로 건너가면서 팀장님은 괜히 미안해했다.


"제가 매니저님께 여유 있게 더 설명을 드려야 하는데, 급하게 마무리해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팀장님. 좀 놀라긴 했는데, 고민 같이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당연히 할 일인데요. 혹시 더 궁금한 것 있으면 메신저로 물어보셔도 되고요. 직무가 달라지는 일이니 강요는 아니지만, 한번 고민해 보세요."


“네, 팀장님. 고민해 보고, 내일까지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팀장님은 웃으며 답했다.


“매니저님, 내일은 주말이니 천천히 생각 잘해보시고, 월요일에 말씀 주세요.”


팀장님과 갈림길에서 헤어지고, 나는 우리 팀 쪽으로 향했다. 아직도 머릿속은 조금 전 대화의 여운이 가득했다.


자리를 비운 시간이 오래였지만, 인사팀장님이 먼저 ‘조직문화 커피챗(coffeechat)’이라는 미팅 초대를 해주어 그건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입사한 지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보통은 10개월 차에 하는 인사팀장 면담은 누구나가 대상이기 때문이다.


돌아온 팀에는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진정성'이라는 모호한 단어에 가려 흐릿해질 뻔한 인사팀장님의 마지막 말이, 조용한 사무실에서 조금 더 또렷이 들렸다.


"이걸 매니저님한테 말씀드리는 게 맞나 싶긴 한데, 마케팅 팀장님이 '마케팅 일은 생각보다 그리 멋있지 않으니, 그런 기대를 가진 분은 계속 일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고객과 관련된

모든 활동


요즘은 주말에 딱히 약속을 잡지 않는다. 혼자 보내는 여유로운 주말. 보통 날씨가 좋으면 혼자 가까운 산에 오르기도 하고, 가끔 동네와 가까운 서점에 들르기도 한다. 친구들과도 등산을 즐겼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그냥 혼자 무언가 하거나, 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고민을 해야 했던 그 주말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을 아주 좋은 명분이 있었다. 비가 하루 종일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마음이 좀 복잡했지만, 그리 기분 나쁜 복잡함은 아니었다. 기분 나쁜 비와, 시원하게 온갖 묵은 세상의 때를 다 씻어낼 것 같은 그런 빗줄기도 있듯이. 차분한 공기에, 조용히 치는 잔물결—그 설렘.


PC를 켜고,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고 검색했다.


'마케팅.'


짧은 정의가 보였다.


'마케팅은 시장 경제 또는 수요를 관리하는 경영학의 한 분야이다. 소비자를 대상으로 고객을 창조하고 유지·관리함으로써 고정고객으로 만드는 모든 활동 즉, 고객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대학교 경영학 수업 시간에 분명 마케팅에 관한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은 거의 나지 않았다. 설명이 어딘지 막연했다. 특히 이 표현이 그랬다. ‘모든 활동’. 도대체, 어디까지 마케팅 활동일까? 이번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마케팅 직무’를 검색해 보았다. 수많은 설명, 블로그 글, 인터뷰 기사가 보였다. 하나씩 열어보았지만, 별로 눈에 들어오는 설명은 없었다. 아, 인재채용 사이트.


한 채용 사이트에 가서 '마케팅'을 검색해 보았다. 수천 개도 넘는 채용 공고가 있었다. 그중 큼직하게 보이는 광고들부터 살펴보았다. 콘텐츠 마케터, (5년 이상) 마케터 채용, 브랜드 마케터, 디지털 마케터, 서비스 마케터... 참 다양한 △마케팅, ○마케팅, ☐마케팅들... '내가 할 일은 뭘까?' 결론 없는 질문 끝에, 앞선 검색 결과로 접한 그 문장이 떠올랐다.


'... 즉, 고객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우리 회사와 비슷한 고객군을 가진 건 업종이 비슷한 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니어, 헬스케어, 안전' 키워드를 입력해 봤다. 회사들 중, 가장 많은 채용을 하고 있는 곳의 공고를 살펴보다가 어느 회사의 마케팅 팀 3-5년 차 채용 공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온 결과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일을 한다고? SNS 콘텐츠에 프로모션 기획은 또 뭐지? 제품 브로슈어, 카탈로그, 제안서 기획 및 제작..., 디지털 마케팅 전략 수립, 실행, 리포트,... 보통은 영업팀이 신청해서 나가던 전시회, 업체가 관리해 주던 (늘 골치였던) 홈페이지도 관리해야 한단다. 블로그, 에이전시와 커뮤니케이션, 서비스 개선 및 신제품 출시 기획,...'


아득했다. 모르는 것들 천지였다. 아니, 개념은 대충 알겠지만, 이걸 기획하고 실행하고, 관리까지 잘할 자신은 사실 없었다. 일의 종류가 참 많은 것 같은데, 새로 생긴 팀에 이렇게 잘 모르는 사람이 함께하는 걸 팀장님은 싫어하지 않을까?


검색을 하며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이 밀려왔다.


'그만하자.'


브라우저를 닫았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어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에 맺힌 물방울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밖에 나가 걷고 싶어졌다. 아직은 비가 오고 있는 거리로 우산을 쓰고 나섰다.



이질적인 것들의

조화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맞은편, 좀 오래된 골목에는 좋아하는 디저트를 파는 작은 카페가 있다. 생각이 복잡할 땐 이곳에 들러 단 커피와 간식을 먹곤 했다. 그날도 카페에 가자, 이 시간이면 늘 있는 사장님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늘 계셨네요. 카페가 왠지 좀 바뀐 것 같은데요?”


“그쵸. 조명을 좀 바꿔봤어요. 역시 바로 알아봐 주시네요. 마음에 드세요?”


“네, 왠지 더 편안한 분위기네요.”


늘 편하게 대하니, 나는 사장님이 있을 때 이곳에 오는 것이 좋았다. 보통은 라테에 시럽을 넣거나 바닐라라테를 주문했는데, 오늘은 다른 메뉴를 먹어보고 싶어 메뉴판을 보았다. 사장님은 카운터 한쪽에 놓인 포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에 ‘아포가토 브륄레’를 새로 출시했거든요. 자극적이지 않게 달고, 꼭 달고나 먹듯이 재미도 있고요. 어떠세요?”


“아, 신기하네요. 그거 주세요.”


주문을 마치고, 비가 내리는 통창을 바라보며 바 테이블에 앉았다. 커피 머신이 내뿜는 증기 소리, 템포가 빠르지만 높낮이가 은근해 휴식에 방해되지 않는 재즈 BGM, 살짝 낮아진 조도의 중앙등과 눈이 편해진 테이블 위 스폿 조명, 그리고 창을 두드리는 비 — 이질적인 것들이 어우러진, 따뜻하고 조용한 공간이었다.


잠시 후, 사장님이 테이블로 커피를 조심스럽게 가져다주며 말했다.


“티스푼으로 맨 위의 얇은 막을 먼저 깨서 조각을 한 번 맛보세요. 처음에는 섞지 마시고 크림과 떠서 드시다가, 나중에 아래쪽 커피와 함께 드세요.”


‘먹는 방법이 따로 있었구나.’


내가 좋아하는 커피와 크림, 달콤한 과자가 잔 하나에 담긴, 신기한 구성이 재미있었다.


사장님이 말한 대로 티스푼으로 잔을 덮은 얇은 막을 두드려 깨서, 조각을 맛보았다. 달았다. 바삭함 끝에 기분 좋은 부드러움. 입술에 묻은 크림을 티슈로 닦다가 문득, 집에서 찾아본 마케팅과 연관된 단어들이 떠올랐다.


‘고객, 프로모션. 신제품 출시. 커뮤니케이션… 카페의 환경을 바꾸고, 새로 음료를 출시하고, 그걸 소개하기 위한 포스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설명하며 주문을 유도한 사장님…’


그리고 직접 가져다주며 먹는 방법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 사장님의 친절한 서비스까지, 카페의 모든 표정과 제스처가 마케팅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리고,...


모두 같은 목소리를 내고, 같은 자세로 일하고, 같은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가는 사무실 공간이 떠올랐다가, 이내 기억 저편으로 흐릿하게 사라지는 듯했다. 어쩌면 나는 그 순간 다른 세계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었을지 모르겠다.


마케팅이라는 낯선 세계, 이질적인 것들의 조화로움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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