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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남겨진 회의실

미지의 마케팅 나무 - ep.2

by 케니스트리

금요일 오후에는 맡은 업무의 진행 상황을 정리해 클라우드 공유 문서에 업로드해야 한다. 매주 반복되는 일이기에 이제는 익숙하다. 팀장님은 그 자료를 참고해 월요일 팀 업무 보고를 준비한다. 우리 팀 일은 대체로 가상의 공간에서 주고, 받고, 정리된다.


‘스튜디오 제품 촬영 준비도 마쳤고, 기술 스토리 정리도 끝. CRM* 시스템의 데이터베이스 최신 버전이랑 자사몰 실적 업데이트도 완료. 아, 이번 주엔 경제진흥원에서 요청한 디렉터리북 양식도 보냈지. 다음 주는 촬영 일정 때문에 정신없겠다.’


느낌에, 마케팅팀의 시간은 참 빠르게 간다. 특히 이벤트가 있는 주는 더. 아주 처음, 이 일을 막 시작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는 생각보다 바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정신이 없었을 뿐. 마케팅 팀장님이 새로 오고 팀이 꾸려질 무렵과 비교하면, 지금은 일 관리가 제법 수월하다. 물론 여전히 예기치 못한 어려움은 도사리고 있고, 피할 수 없다.


‘초심(初心)’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처음의 마음을 잃으면, 빠른 유행에 뒤처지고 도태되기 쉽다고 했다. 그리고 마케팅에서 첫 마음이란 이 일이 설레던 처음처럼, '익숙함'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팀장님이 말했었다. 이 일은 여전히 어렵고, 많은 순간이 새로워야 한다고.


돌이켜보면, 이 일의 처음은 분명 설레었지만, 별로 유쾌한 시작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 며칠 전, 나는 그 회의실에 혼자 남겨졌었다.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은 ‘고객 관계 관리’를 의미한다. 간단히, 고객의 정보와 응대 이력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더 나은 서비스와 마케팅, 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이나 시스템을 말한다. 기업은 CRM 툴을 활용해 고객의 구매 여정을 기록하고,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잠재적 영업 기회로 이어지도록 관리한다.




회피형 팀장


운영팀장님은 조용했지만, 분명 감정 기복이 있었다. 그의 말투 하나에 팀 분위기가 휘어졌고, 보고의 흐름도 달라졌다. 팀원 모두 그가 원하는 대로 답하고, 그의 기분을 살피는 듯 보였다. 건조한 보고가 이어졌다.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 분위기는 의지를 가뒀다. 그렇게 느낄 무렵, 나는 그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회사에서의 짓눌린 감정, 계속되는 두통을 해소할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해소는 해결과 달랐다. 명화에게 하던 푸념도 잠시였고, 절친과의 잡담도 서로가 지친 듯 자연스럽게 하지 않게 됐다.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의 포스터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섰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벽에 붙은 포스터가 답을 줄 리 없었다. 한 사람, 그것도 회사 상사와의 갈등이 나의 퇴근 후는 물론 주말까지도 잠식해 오다니. 삶에 틈이 없어진 셈이다.


그 주말 저녁,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월요일에 출근해서 팀장님에게 메신저로,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1:1. 스타트업에서는 흔한 ‘원온원’ 문화지만, 이곳에선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비로소 마주 앉은자리에서, 나는 용기를 내어 최근의 작은 마찰들, 스스로 느끼는 불편함, 혹시 개선했으면 하는 점들에 대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팀장님은 “아, 그건 오해예요”라거나, “그럴 리가요, 매니저님 예민하신 거예요”와 같이 답하며, 문제를 직면하기보다는 고개를 살짝 돌리는 듯했다. 결국 하지 않느니만 못한 면담은, 형식적으로 끝났다.


그 이후, 자연스럽게—아니, 극단적으로 더 멀어진 느낌이었다. 회피하는 팀장님을 마주하며, 나 역시 점점 소심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는 진심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나의 진심은 미움받고 있었다.


회의 시간이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팀장님이 지목한 순서대로 각자의 업무 진행 상황을 보고했고, 그로부터 피드백을 간간히 전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다들 바쁜 일 많을 텐데,... 오늘도 수고했고요.”


팀장님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소위 '벙찐'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퇴장하고 나서, 조용히 노트북과 필기구를 챙겨 회의실을 나왔다.


자리로 돌아와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곧 버려질 커피. 나 같았다. 한때는 뜨거웠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동 없이, 그저 미지근하고 쓴 검은 액체일 뿐이다. 열정, 공간을 채운 공기, 커피... 그 곳에서 따뜻한건, 눈에 차오르는 무언가였다. 눈은 모니터에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 그 회의실에 머물러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갈등은 언제나 이렇게 조용하게 커지고, 어떤 사건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늘 그렇다. 뭔가가 어긋났다는 걸 느낄 땐, 이미 분위기는 달라진 지 오래다. 그렇기 마련이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는 알고 있는 종류의 공기, 그런 것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어색함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받는 월급만큼은 일하자'는 마음이었을 뿐이다. 그건 특별한 각오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남의 돈 벌기가 제일 어려운 게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렇게 살려고 애썼을 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요즘 일하는 문화에서는 과욕이었던 걸까? 조금은, 아니 조금 더 강하게, 이런 일은 부당하다고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더 젖기 전에, 꾹 참으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본부장실'이라고 쓰인 문 앞에서 멈췄다.


본부장님


남들이 뭐라든, 나는 본부장님을 신뢰했다. 그가 조직 전체를 조용히 돌보고 있다고 느꼈다. 회계 전공에 미국 회계사 자격을 갖고,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몇몇 큰 회사를 거쳐 우리 회사의 경영본부장으로 왔다고 들었다. 스스로 '회계사 할 성격은 못 돼서' 경영일선에서 일해왔다는 그는, 온화한 얼굴로 때때로 끝이 뾰족한 종이비행기 같은 말을 던지곤 했다.


그 어떤 상처도 주지 않는, 유려하고 유연한, 그러나 날카로워 고민하게 하는 질문들. 그는 경청하고, 변화의 흐름에 반응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는 여러 리더 중, 내가 처음으로 '본부장 다움'을 느낀 사람이다. 고작 전체 경력 3년 차 주제에.


본부장님의 메신저 프로필 상태는 '업무 중'이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주저함은 없었지만, 노크할 결심은 쉽게 서지 않았다. '돌아갈까?' 순간 스치는 생각. 아니야,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심장이 조급히 뛰기 시작했다. 콩닥콩닥. 그런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쩐지 이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주저함은, 개인보단 회사의 절차, 분위기를 더 살피도록 조직원으로 길들여진 증명일 것이다. 그에 대한 반감에 여기까지 왔지만, 결국 난, 발걸음을 돌렸다.

터덜 터덜, 올 때 보단 조금 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지, 나 찾아온 거야?"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본부장님이었다.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오다가, 주저하던 날 발견한 듯했다. 얼떨결에 꾸벅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기분과는 다르게, 인사와 동시에 자동으로 떠오른 어색한 미소. 본부장님은 반기는 얼굴로 "들어와"라며 자신 방의 문을 열어주셨다.


"어, 미지. 잘하고 있어?"


불을 켜는 대신 블라인드를 걷고, 자연광으로 환해진 창가 쪽 자리를 가리키며 본부장님이 물었다. 그 인사는 본부장님 특유의 '잘하고 있어?'였지만, 그날은 어쩐지 '잘 지내고 있지?'로 들렸다.


"네, 저..."


말을 꺼내려다 멈췄다. 또르르. 참지 못했다. 눈물이 뺨으로 흘렀다. 본부장님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편안한 눈으로 다시 물었다.


"왜, 누가 괴롭혀?"


마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온화한 미소와 함께 묻는 본부장님의 질문에 허를 찔린 기분 보다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사실 말을 미리 준비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간의 사정을, 두서없이 털어놓았다. 팀에 도움이 되고 싶었고, 부끄럽지 않게 일하고 싶었는데, 몇 번 미운털이 박혀 이제는 눈에 띄게 업무에서 배제를 당했다는 게 요지였다.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본부장님은, 이렇게 물었다.


"다른 팀원들은,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게 일하는 것 같아요?"


종이비행기 같은 질문이 이번에는 나의 이마를 '콕'하고 직격 했다. 얼굴이 조금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나만 유난했던 걸까? 말을 잇지 못하자, 본부장님은 웃으며 이어 말했다.


“미지는 앞으로 크게 자랄 새싹 같은 인재네”


오랜만에 듣는 인정과 이해의 말 때문이었을까.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인 본부장님. 본부장님의 반복된 끄덕임에는 어떠한 절차도, 형식도 없었다. 팀장의 끄덕임과는 달랐다. 확실히 본부장님은 '공감'하고 있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찾아와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요즘은 팀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이렇게 말이라도 해주면 고마운 일이지. 그리고 의욕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답답한 환경이라는 건, 나도 책임이 크지. 그런데 말이야, 이게 꼭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고의 문제는 아닐 수도 있어. 조직이라는 건… 어떤 모양을 가지거든. 틀이라고 해야 하나? 운영팀의 틀과 미지의 모양이, 어쩌면 잘 맞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우리 매니저님한테 도움이 될 일을 한번 고민해 볼게요. 필요하다면 경영지원 팀장과 한 번은 얘기를 해봐야 할 거야. 그 과정에서 다소 불편한 일이 생길 수도 있어. 이런 게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거든.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장님의 말은 위로이자 약속처럼 들렸다. 내가 이 문을 두드리기까지의 망설임과 용기가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서서히 가슴을 채웠다. '찾아가길 잘했어'. 본부장실을 나와서 자리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그럼에도 뭔가 시끄럽거나, 요란한 일은 없기를 바랐다.


오후가 되었다. 팀장님이 자리를 비우면, '혹시 본부장님을 만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의미했다. 내가 한 행동이 '고자질'은 아닐 거라며, 그렇게 위안하고, 또 그렇길 바랐다. 결과가 모두에게 좋은 방향이면 좋다고 생각했다. 그냥 모든 감정이, 조바심 비슷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내 마음과는 다르게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났다. 또 그다음 날도 평온했다. 팀장님은 말이 없었고, 그에 따라 공간도 조용했다. 키보드 소리만 들렸다. 업무 중에는 필요한 말만 주로 오갔다. 명화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때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영원히, 이대로일 것 같았다. 이튿날 아침, 인사팀장님의 메시지가 이 적막한 공기를 가르고 날아들기 전까지는.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이야기 좀 나눴으면 합니다'


다시 크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p.s. 연재는 일주일에 두 번, 수요일과 목요일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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