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마케팅 나무 ep.5
비 온 뒤, 맑고 개운한 공기 속에서 평소보다 더 오래 걸었다. 걷는 동안 생각이 이어졌다. 새로운 한 주의 시작에, 난 인사 팀장에게 답을 해야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마음은 대략 그쪽으로 기울었으니까.
그래도 여전한 안갯속 같은 기분, 여전한 불안함.
'사회생활 3년은 날 이렇게 소심하게 만들었구나', 깨달았다.
밤늦도록 뒤척였는데 눈은 일찍 떠졌다. 아직 울리지 않은 알람을 끄고, 물로 세수를 했다. 아침식사는 원래 잘 먹지 않는다. 늘 그렇듯, 커피나 한 잔 사서 회사로 가야지.
회사가 있는 논현동까지, 출근길 9호선은 언제나 혼잡하다. 게다가 월요일. 그러니 평소보다 15분은 더 일찍 나와야 했다. 그날은, 평소 출발 시간보다 20분은 먼저 나섰다.
비 온 다음날이라 그런지, 갑자기 훅, 찬 기운이 느껴져 옷깃을 여몄다.
승강장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전철을 기다리며 서 있는데, 평소 눈길을 주지 않던 광고가 보였다. 스크린도어 위와 좌우, 큰 공간에 가득 들어찬 광고들. 내가 서 있는 문 양 옆에는 개봉 예정인 영화 광고가 있었다. 좌부터 우까지 메시지가 이어졌다.
이미 개봉 전부터 기대된다며 매스컴에 오르내린 영화의 광고는 승강장 스크린도어 양 옆과 위쪽 광고면을 모두 점유했다. 심각한 표정의 배우 둘, 그리고 어두운 뒷배경. 위쪽에는 검은색 배경에 다소 강렬한 메시지가 쓰여 있었다.
그 옆은 탈모 샴푸 광고였다. 앞머리를 내린, 6:4 정도의 가르마가 차분하고 멋진 남자모델이 새하얀 의상을 입고 샴푸통을 하나 들고 있는 광고는, 커다란 이미지가 거의 전부였다.
"원래 진짜는 말이 별로 없어"
언젠가 엄마가 빈 수레가 요란하다며, 말 많은 이웃집 아주머니를 비꼬아한 말이 생각났다. 이미 잘 알려진 브랜드이니,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 없는 거겠지.
'그러면 광고를 왜 하는 걸까?' 목적이 궁금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귀에 이어폰을 꽂고 휴대전화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승강장 문 주위의 커다란 광고에 시선이 머문 이는 거의 없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이런 광고 효과라는 게 따로 있는 걸까?'
예전에 작은 네일숍을 운영하는 사촌언니가, 본인은 기계치라서 포털 업체등록이나 지도 장소등록도 겨우겨우 한다며 투덜댄 적이 있었다. 주변에 경쟁업체들은 SNS 광고도 잘하는 것 같다며.
만약 언니가 지하철 광고를 한다면, 업소가 있는 역 근처겠지? 근데 잘 보니 승강장 안에 네일숍이나, 미용실, 하다 못해 학원이나 식당 광고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영화 광고, 치과 광고, 샴푸 광고는 있어도, 우리와 인접한 서비스는 없는 것이 의아했다. ‘비싸서 그런가’.
지하철이 도착해 문이 열리고, 아직은 조금 여유가 있는 차량에 올랐다. 문 앞에, 조금 더 작은 광고들이 눈에 들어왔다.
'DW제약 3상 임상 모집,... 그리고 이 쪽은 공무원 자격증 학원 광고구나'
광고 크기는 작았고 우리 눈높이와 그보다 높은 곳에도 있었다. 바깥 광고보다 글은 더 많았다. 그리고 광고 주제도 조금 달랐다.
'한 번도 의심하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네.'
무슨 제품을 어디에 광고하는지는, 아마도 광고 비용이랑, 그걸 주로 보는 사람들의 차이이려나?
전철 광고 대부분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제품이거나 서비스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 우리 회사와 같은, 기업 간 거래 위주의 상품 광고는 잘 보이지 않았다.
회사가 가까운 역에 도착해 출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는 길에, 탑승장에는 없었던 지역 광고들이 보였다. 한의원, 갈빗집, 세무사 사무소 광고들은 벽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헬스클럽 프로모션 광고는, 아주머니들이 돌리는 전단지에 있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거절하지 못하고 전단지를 여러 장 받아 들고야 말았다.
출근을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그날따라 팀장님이 일찍 와서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나지막이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받는 둥 마는 둥, 하는 상대에게 하는 인사는 늘 그 끝이 개운치 않다. 인사를 하는 사람도 왠지 기계가 된 느낌이라서.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지'. 요즘 제일 많이 하는 생각이지만, 그게 잘 안된다.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인사팀장님의 인사가 들렸다. 인사팀과 그 옆 회계팀에 먼저 출근해 있던 사람들 몇이 화답했다.
'말 한마디가 공기의 색을 정하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아, 하고 정신을 차리고 메신저를 열었다.
'팀장님, 혹시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인사팀장님은 3분 정도 지나서 답을 했다.
'네, 매니저님. 잠시 커피 사러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안 그래도 커피가 필요했는데, 잘 됐다 싶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회의실에 들어가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커피를 사러 다녀오는 길이 더 반갑다. 이번에는 회사가 입주한 건물의 자주 가는 카페로 갔다.
"오늘은 월요일이니까, 제가 삽니다. 아, 월요일에만 살아있단 이야기는 아니고요."
"엇,..."
당황하며 말을 잇지 못하자 '풉' 하고 웃는 팀장님. 말이 재밌다기보다, 그냥 그 말을 하고 혼자 웃는 팀장님이 웃겨서,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그 때문일까, 긴장된 이야기를 앞둔 상황에서도, 분위기는 편안했다.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각자 받아 들고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매니저님, 주말에 고민 좀 해 봤어요?"
팀장님은 잠시 나를 살피듯 하다가 물었다.
"네 팀장님. 토요일까지는 잘 모르겠다가, 솔직히 일요일부터는 조금 마음이 기울었어요. 저, 새로운 팀에서 일해보고 싶어요"
팀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했다.
"저야 조언을 드리기보다 절차를 돕는 역할이긴 한데, 어쨌든 빨리 결정해 줘서 고마워요. 너무 큰 부담은 갖지 말아요. 좀 해 보면서, 또 아니다 싶으면 같이 고민해 보고, 그러면 되죠"
"네, 감사드려요"
그리고, 인사 팀장님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다.
"저 여쭤볼 게 있는데요, 팀장님. 저처럼 이렇게 직무가 바뀌는 경우가 많이 있나요?"
"회사에서 이런 일은 종종 있죠. 매니저님처럼, 완전 다른 분야로 옮기는 것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아요"
팀장님은 눈을 위로 치켜뜨고, 잠시 "음..." 하더니 답했다.
"흔한 일은 아니죠. 아주 없지도 않아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일단 제가 처음에 인사팀 일을 했던 게 아니었어요. 저 원래 엔지니어 출신이에요."
"엔지니어요? 아니 그럼, "
"저 공대 나왔어요. 제가 감수성이 좀 풍부해서 사람들은 인문학을 한 줄 아는데, 사실 공부는 공학을 했네요. 신입 때 사수한테 엄청 깨지면서 배웠는데, 영 일이 재미가 없더라고요"
한 템포 쉬어가듯, 커피를 한 잔 마신 팀장님이 이야기를 이어했다.
"우연히 나간 직장인 커뮤니티에서 인재 추천 에이전시를 창업하신 분을 만났거든요. 얘기가 잘 통해서 친해졌죠. 그분이 엔지니어 경력이 있는 걸 알고 그분이 저한테 제안을 하더라고요"
"제안이요?"
"네, 혹시 헤드헌팅 일을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요"
"아..."
'헤드헌팅(headhunting)'은 인재 추천을 통한 채용 방식으로 알고 있었다. 주로는 경력자와, 경력자를 필요로 하는 회사를 이어주는 사람을 헤드헌터 라고 한다고, 명화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제가 성격이 좀 밝고 사람 좋아하거든요. 같은 일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제가 유독 그랬던 것 같아요. 게다가 아무래도 시스템 엔지니어는 좀 전문적인 분야니까, 관련 일을 하고 있는 제가 잘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웃으며 이야기하는 팀장님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어갔다.
"제가 그 일을 잘했던 모양이에요. 원래는 그분을 도와서 부업 개념으로 추천자 이력서를 검토하고, 또 주변에 전공자들 중에 아는 분들 소개를 받아 연결하고 하다가, 그분이 설득을 해서 일을 그만두고 그분이 차린 HR회사에 들어간 거죠. 경력 시작한 지 3년쯤 됐을 때였던 것 같아요. 에이전시에서 한 2년 반 일했나, 그동안의 경험 살려서 외국계 IT회사 인사팀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거기서 일하다가 우리 회사에 팀장으로 오게 된 거고요"
결정은 했어도, 직무를 떠나 나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중 인사 팀장님의 직무 전환 이야기는 참 신선했다.
"팀장님, 지금 하는 일 좋으시죠?"
우리 팀이 있는 층 복도에서 나지막이 물었다.
"저는 후회는 안 해 봤어요. 결국 제 시작과 관련이 없지 않더라고요. 매니저님도 나중에 느끼시지 않을까요?"
'시작과 관련 없지 않다...?'
아리송했지만, 마지막 말은 왠지 응원 같아 좋았다.
오전에 운영 팀장과 면담이 있었다. 인사발령 관련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본부장님께 무슨 이야기 들었어요?"
본부장님과는 상담 한 번 했고, 이후에 새로 생기는 팀에 추천하셔서 그걸 승낙했다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래도 나랑도 얘기 좀 하지..." 라면서 원망하듯 이야기하는 팀장님.
'제가 예전에 대화 하잘땐 피하시더니, 무슨 말씀이세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인사를 했다. 진심을 담아, 정중히.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직 제 온도를 간직한 커피 앞에서 인사팀으로부터 도착한 메일을 열었다.
수신인에 대한 부서 전환을, 아래와 같이 통지합니다.
• 변경사항: 소속 부서 재배치
• 변경 내용:
- 성명: 이미지
- 직위: 매니저
• 변경사항:
- 명) 영업본부 마케팅팀
- 면) 경영지원본부 운영기획팀
여러 번의 혼란, 몇 번의 대화, 그리고 이틀의 고민 끝에 난, 마케팅팀 매니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