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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리 Aug 05. 2018

이것도 출판이라고

마지막은 조금 진지하게?

도피성 출판일지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속한 환경과 교육 내용에 따라 세계관을 형성한다. 나 역시 그랬다. 어릴 때부터 받아오던 어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인생의 목표여야 했다. 이왕이면 악착같이 노력해서 가난한 출신성분이나 낮은 사회 계급을 벗어나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서 집 사고 차 사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으면 더 좋았다. 어렸을 때는 분명 사회에서 인정하는 '일반적인' 세계관에 충실했었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싶었고 돈도 많이 벌어서 가족들 호강도 시켜주고 싶었다. 큰 회사, 좋은 회사에서 나라는 인재를 알아봐 주기를 그리고 간택해 주기를, 그리고 투자해 주기를 바랐고, 열심히 회사의 조건에 맞춰 이력서와 자소설을 썼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과연 '성공'이 '인간다운 삶의 필요조건'인지, '안정적인 삶'이라는 것이 '존재'는 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은 현재의 구조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능성이 없어보이는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현실성이 없다'고 말하곤 한다. 한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현실성'이라는 인질에 발목을 잡혀 끝모를 함정으로 빠고드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지만 각자 다른 '현실' 속에 산다. 분명 내 목소리는 이쪽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나는 대체 누구의 판단력을 믿고 어떤 현실에서 살아가려 하는 걸까? 


매일 다 써진 책 같은 하루가 찾아오는 것이 견딜 수가 없어 졌을 때, 코믹 릴리프 시리즈를 꿈꾸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꼭 출판을 직접 하는 게 정답은 아니었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나만의 길을 만들어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구조 속에서 버텨낼 깜냥이 안 되는 쫄보라 혼자서 꾸물꾸물 탈출구를 만들었다. 어쩌면 내가 한 일은 뭔가 다르게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할지 몰라서 시작한 '도피성 출판'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을 볼 때 어떤 일을 하는지보다는 무슨 생각으로 그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 책을 만들든, 빵을 굽든, 청소를 하든, 노래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자신이 '진정으로' 믿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감동을 받는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유머라도 있어야지 않겠어?


사람들은 각자 다 다른 세계관을 지니고 살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명제가 하나 있다. 삶은 원래 다 거지 같다. 그리고 인간은 다 죽는다.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삶은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나마 덜 거지 같게 살기 위해 미란다와 에이미 같이 웃기는 여자들을 찾아내고 내게 재밌게 느껴지는 일을 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코믹 릴리프 시리즈의 첫 캐치프레이즈는 '웃기는 여자가 세상을 뒤집는다'였다. 밥상 엎듯이 확 뒤집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니 내가 좋아하는 여성들의 유머는 아주 잠깐씩 모자이크 타일 뒤집히듯이 세상을 뒤집어놓는다. 그 반짝하고 빛나는 유머의 순간이 너무나 좋았다.


'여자는 안 웃긴다'는 편견을 뒤집을 때, 더 나아가 '네가 웃기다고 생각하든 말든 신경 안 써. 판단은 내가 해!'라고 외치며 세상에 한 방 먹일 때, 훌러덩 옷을 벗어재끼며 여성의 몸이 성적 대상이 아니라 웃기는 주체로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눈치 보지 않고 말달리기를 하며 '입고 싶은 옷을 입으라'고 단호하게 내뱉을 때 나의 거지 같은 삶이 밝아졌다. 예쁜 롤모델, 멋진 롤모델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소녀들에게 '웃기는 여성 롤모델'을 접할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의 내가 바랐듯이. 



간신히 선택의 문제


가끔씩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게 부럽다고 어떻게 하면 1인출판을 할 수 있는지 묻는 사람이 있다. 묻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알지 못하니 대답을 하기가 참 난감한 질문이다. 처음 <미란다처럼>을 만들기 시작할 때는 호~옥시나 내가 하는 일을 성급하게 따라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1인 출판, 책덕을 따라하지 마시오'라는 글에 기존 출판사의 수익 흐름을 정리해 보기도 했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누군가를 위해 쓴 글 같지만 실은 내가 출판을 시작할 때의 주의점에 대해 다 알고 하는 중이라는 걸 티내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얼핏 보면 '선택의 문제' 같지만 내가 경험으로는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이 필요한 것 같다. 내가 만약 아직 학자금을 다 갚지 못했거나 반지하라도 전세집이 없었거나 가족을 부양해야 했거나 가까운 사람이 강력하게 반대하기라도 했다면 섣불리 회사를 그만두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선택의 문제' 이전에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이후 질적으로 낮아질 삶을 감당할 준비도 해야 하고(구체적으로는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보험이나 연금을 해약했고 생활비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변화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절박한지 그 한계점에도 다다라야 한다. 출판에 대한 기본 지식과 응원해줄 수 있는 주변 사람들도 중요하다. 


미란다의 책을 만났던 순간이 아마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물론 넉넉한 '선택의 문제'가 되는 순간은 아니었기에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큰 자본금도, 사업 대출 없이 그저 딱 <미란다처럼> 선인세와 제작비만 충당할 수 있는 600만원을 들고 시작했으니. 정말 '간신히' 선택의 문제였던 상황이었다.


믿는 것을 실천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 책 <미친년> 7쪽


똑같이 하려고 시작한 건 아니니까


'그냥 출판'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출판'을 목표로 했기에 이미 굳어진 관행이나 시스템에 맞춰 가진 않겠다는 다짐을 했고 지키려고 노력해 왔다. 물론 출판의 기본적인 틀 위에서 출판 행위를 해야 하겠지만 나 자신이 납득이 가지 않을 때는 무엇보다 나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급하지 않게, 만들고 싶은 책만 만들기 

내가 재밌는 방식으로 책 만들기

내가 재밌는 방식으로 책 알리기

텀블벅으로 크라우드 펀딩 (요즘은 많지만 당시에는 번역서를 크라우드펀딩으로 만든 사례가 많지 않았다) 

아무리 대형서점이나 도매상이라도 거래 조건이 일방적으로 느껴진다면 거래하지 않기

작은 책방에 직거래하기

작은 책방에서만 굿즈 증정하기

작은 책방 직접 배달 다니기

마을시장에서 책 팔기

대형서점보다 작은 책방과 거래할 때 더 친절하기(?)

대형서점보다 작은 책방의 공급률을 더 낮추기

자유 일꾼으로서 사람들과 연결되기


가끔 내가 출판하는 방식을 말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나와 다른 시각에서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사업자 대출도 없이 퇴직금 600만원으로 겨우 책 한 권 계약해 번역부터 유통까지 혼자 다 하는 이 출판이 소꿉장난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나중에 "좋은 경험이었어요!"로 마무리되는 비싼 취미생활이라고 치부될지도 모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나의 '경험'상 '경험'이야말로 삶을 바꾸는 '점'이다. 스티브 잡스 씨가 스탠포드대학 연설에서 말한 '점' 말이다. '경험'이 연결되어 내 삶의 방향을 바꾸어 간다. 누군가 나에게 번역을 시켜주지 않으니 직접 번역하는 경험을 만들 수밖에. 80년 인생에 5년을 직접 번역하고 출판하는 삶으로 채워왔으니 어쩌면 그런 것 치고 내 첫 사업자금(이자 퇴직금) 600만원은 저렴한 가격일지도 모른다.


아마 나에게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이런 말이 떠다니지 않을까.


'이것도 출판이라고 하나?' 


누군가의 머릿속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내 머릿속에는 항상 이런 식으로 나 자신에게 딴지를 거는 말들이 떠다니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올바르고 성공적일 순 없더라도 최대한 나의 신념과 마음을 존중하며 일을 하고 있다고 나 자신을 설득한다.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그래서 오늘은 입 밖에 내어 대답해본다.


"이것도 출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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