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이 사바이

by 문연이

치앙마이를 떠돌던 어느 여름의 초입이었다. 이만한 충동구매를 해본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급하게 떠나온 여행이었다. 출발 일주일 전에 산 비행기표, 출발 3일 전에 예약한 괜찮은 가격의 에어비앤비. 딱 이 정도면 국경을 건너기 충분했다. 뭘 찾고 비교하고 예약하는 일이 전부 귀찮게만 느껴졌다. 날 귀찮게 하는 것들로부터, 조급하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떠나기 위한 여정이었기에 굳이 감수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행은 튼튼한 두 발과 유심칩, 구글맵만 있다면 웬만큼 위험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리란 걸 그간의 경험을 통해 배운 터였다.


무기력한 시기였다. 수리력과 창의력을 동시에 발산해야 하는 업무를 맡았고 이는 내 스트레스 게이지를 점차 높여갔다. 이들에게 쫓기거나 둘러싸여 불에 타는 꿈도 종종 꾸었다. 바닥 친 자존감을 끌어올릴 힘도 없어 그 채로 도망을 택했다.


도망은 성공적이었다. 도착하는 날 친구에게 추천받아 들어간 바에서는 이 시대 가장 트렌디하다고 할 만한 힙한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오직 태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신기한 이름의 칵테일도 주문했다. 칵테일 한 모금에 열 번의 들썩임. 이 리드미컬함이 마음에 들었다. 음악에 맞춰 어깨를 좌우로 살짝살짝 털어줄 때마다 어떤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듯한 해방감이 들었다. 알코올에 불타는 칵테일을 만드는 바텐더를 보며 옆에 앉아있던 외국인 커플과 함께 ‘어메이징!’하고 환호했다. 한 잔으로 끝낼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패션후르츠가 들어갔던 첫 번째 칵테일과 비슷한 것으로 추천을 받아 두 번째 잔을 주문했다. 역시나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치앙마이에서의 첫날밤이 무르익어갔다.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유쾌한 햇살이 방안을 비췄다. 첫날밤의 칵테일이 너무나 완벽해서였을까. 왠지 이곳에서의 시간을 더 알차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글맵과 블로그와 검색을 총동원해 맛집, 카페, 볼거리들을 찾았다. 구글맵 평점과 블로그 후기의 비교 작업을 거친 후에야 오늘 하루 둘러볼 곳들의 리스트업을 끝내고 숙소를 나섰다.


오픈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국숫집, 인스타 핫플의 느낌이 물씬 풍기던 ‘어반’ 스타일의 카페,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맥주 맛을 돋우던 레스토랑, 귀여운 나무 의자가 놓여있던 작은 서점. 눈에 띄는 건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남들 가본 곳은 하나라도 더 가보려고 뙤약볕에도 걷기를 멈추지 않으며 연신 셔터를 눌렀다. 도장 깨기 하듯 찾아다닌 곳들은 모두 좋았다.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지 잘 도망쳐왔다고 생각했던 곳에 다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잘 떨쳐냈다고 생각했던 조바심이 다시 날 찾아낸 것만 같았다.


평점은 여기가 0.1점 더 높은데,

아 근데 이 후기가 사실이면 진짜 별로겠다.

여기도 꽤 괜찮아 보이는데?

막상 갔는데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여기 갔다가 저기 가면 시간이 빠듯하긴 하겠다.

그래도 둘 다 잠깐씩 보고 올까?

여긴 사람들이 너무 많이 간 데라 별로

여기는 평점이 없어서 불안하네.


세 번째 아침이 찾아왔다. 분주하게 준비하고 싶지 않아 하얀 이불에 폭닥 파묻혀 잠시 뒹굴뒹굴했다. 브런치 먹을 곳만 찾아야지 싶어 검색하다가 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글에는 ‘사바이 사바이’가 적혀 있었다.


택시를 타고 검색으로 찾은 브런치 카페에 가는 내내 그 말이 입에 계속 맴돌았다. 박하사탕을 다 깨물어 먹고도 남아있는 향처럼. 그 말에 마음을 쓰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은은하게.


로컬들도 자주 온다는 그 카페는 이른 점심시간부터 자리가 차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가 앉을 자리는 남아 있었고 그곳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메뉴판에는 음식의 이름과 재료만 쓰여 있을 뿐, 그것만 보아서는 어떤 요리가 나올지 알기 어려웠다. 친절해 보이는 종업원을 불러 요리가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황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카페 인스타그램에 가득 포스팅된 메뉴를 하나하나 클릭해 설명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스마트폰 화면이 문제였다. 따그닥 따그닥 달려야 할 말이 덜거덕 덜거덕 소리를 내듯 화면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가 설명하려던 메뉴와 다른 포스팅이 자꾸만 띄워져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번역기를 돌리면 ‘아 왜 이러지’가 분명할 태국어를 뱉으며 그의 당혹스러움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순간 입안에 계속 머금고 있던 그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사바이 사바이


안절부절못하며 폰 화면을 1초에 12번 터치하던 그가 풍선의 바람이 빠지듯 쉬익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웃음에 나도 함께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건 일종의 신호였다. 내 말이 진심임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 그와 그의 아이폰6s는 이내 여유를 찾았고 올바른 메뉴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나도 원하던 메뉴를 무사히 주문할 수 있었다.


‘사바이 사바이’는 우리 말로 ‘느긋 느긋’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 말이 왜 아침부터 내 눈에 띄어 내 마음에, 내 입술에 오랫동안 맺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안다. 하지만 구태여 갖은 논리를 펼치며 이유를 설명하고 싶지 않다. 남겨둘 것은, 기억할 것은 사바이 사바이면 충분하다.


가끔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조바심을 느낄 때면 애꿎은 폰 화면을 두드려대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참 별 건 아닌데, 사바이 사바이면 다 되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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