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집에 다녀와서
오랜만에 울릉도 집에 갔다. 외삼촌부터 큰 이모, 작은 이모, 우리 엄마까지 4남매와 함께 사촌 언니와 나, 신이까지 북적북적 모여 같이 저녁을 먹.. 술을 마셨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모두의 귀염둥이이자 가족 모임의 마스코트인 조카 지후 (큰 이모의 손자이자 사촌오빠의 아들)의 이름이 나왔다. 매년 집에 올 때마다 지후는 ‘연이고모~’ 하고 내 옆에 착 달라붙어 나를 비롯한 웃어른들의 예쁨을 받으면서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하곤 했는데 이번 설에는 보이지 않았다. 새언니와 서울 여행을 갔기 때문이다.
큰 이모네는 제사를 지내는데 언니더러 제사는 본인이 지낼 테니 이번 연휴에는 편하게 놀다 오라고 했단다. 덧붙여 사촌오빠에게는 제사는 본인의 제사는 지낼 필요가 없다고도 말했단다. 이야기를 듣던 작은 이모도 두 딸들에게, 그러니까 내 사촌언니들에게 본인 제사 역시 지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단다.
날 받아놓은 사람들도 아니면서 자꾸 제사 이야기를 해서 문득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잠잠히 있던 우리 엄마가 한 술 더 떴다.
“니는 엄마 쓰러지면 뭐 산소 호흡기 코에 꽂고 난리치고 이런 거 절대 하지 마라이.”
아니 우리는 설 명절을 맞아 다정한 마음으로 모인 것뿐인데 왜 다들 유언장을 쓰고 있는 거지? 나는 걱정 말라며 웃음으로 대충 사태를 무마하려고 했다. 하지만 엄마가 손가락을 코에 꽂는 시늉을 했다가 두 손을 공중에 휘익 휘익 저어가며 격하게 의사 표현을 하는 바람에 그냥 ‘알았다.’에서 ‘아↗↘알았다 아↗↘알겠다.’ 하고 나 역시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격하게 동의하고 나서야 호흡기 분쟁을 끝마칠 수 있었다.
우리 모녀가 잠잠해지자 작은 이모가 다시 입을 뗐다. “근데 내가 제사 지내지 말라카니깐 우리 미림이 (작은 이모의 막내 딸) 가 뭐라는지 아나. 제사는 내를 위해서 지내는기 아이고 지들 둘이 그 핑계로 얼굴 한 번 더 볼라고 하는 기란다.”
나는 옆에서 무릎을 탁 치며 “맞다 이모야! 우리끼리 만나서 놀라고 하는기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라면 간 사람들은 가타부타 제사 지내라 말아라 하지 말고, 우리가 알아서 지낼게!” 했더니 이모들과 삼촌들이 빵 하고 터졌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마침 좋은 아이디어가 빵 하고 떠올랐다.
“귀찮게 다 따로 하지 말고, 설이랑 추석 사이에 날 잡아서 사촌들끼리 다 모여가 한방에 지내면 되겠네.”
“맞네 맞네 그거 좋네.” 이모들은 껄껄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엄마는 뭔가 불만이 있는 듯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야 미림아, 문연이 이놈의 가시나가 우리 다 죽으면 설 지나고 추석 전에 다 모여가 한방에 제사 지내자 칸다. 이게 말이가. 이모가 막내니까 이모 죽은 날에 맞차서 지내라 알았제.”
작은 이모 딸한테 전화를 건 것이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나 싶었는데 자기 기준이 아닌 제삿날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막내온탑* 기질이 이런 데서 나올 줄이야. 그런데 언니가 다른 방안을 제시했나 보다. 엄마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막내온탑 : 막내 on TOP, 막내가 그룹 내의 가장 실세라는 뜻.
“야 니 와 외삼촌 날짜에 맞추자카는데! 이모가 막내 아이가 막내. 그럼 내 제삿날에 맞차야지. 니 웃긴다이?”
예의 바른 우리 사촌 언니는 가장 연장자인 외삼촌의 제삿날에 맞춰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오.. 왜 나는 그 생각을 못했지. 아무래도 동방예의지국의 시민으로서 가장 지혜로운 답이었다.
엄마의 반발이 워낙 거센 탓에 누구의 제삿날에 맞출 것인지는 정하지 못했다. 사람을 기준으로 했을 때, 그의 제삿날이 설이나 추석과 가까우면 난감해진다는 이슈도 있었다. 제삿날 논의는 사촌들까지 다 모이는 날 다시 합의하자며 다음 회담으로 미루었다. 대신 각자 자기 엄마, 아빠가 가장 좋아한 음식을 2가지씩 만들어서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였더라? 그게 무엇이든 고맙고 애틋한 마음을 담아 만들겠지만 아무쪼록 그 날이 아주 심하게 지각하길 바란다.
엄마와 이모, 삼촌들의 건강 검진 결과가 궁금해지는 세월이 왔다. 우스갯소리로 제사를 떠들면서도 마음 한편이 시큰했다. 제사란 무엇인가.
우리 가족에게 제사는 다 먹지도 못할 만큼 거창한 제사상을 차려 얼굴도 가물가물한 조상에게 무턱대고 인사하는 자리라기보다 제사, 명절이라는 핑계로 술잔을 맞대고 고스톱을 땡기고 이모부의 색소폰 가락에 맞춰 춤을 추며 나중에 웃고 떠들 이야깃거리 하나 더 만드는 자리다.
“사는 게 뭐 있노. 그냥 이렇게 같이 어불려가 노는 거지.”
큰 이모의 말처럼, 먼 훗날에야 지내게 될 제사일랑 잊고 그저 오래오래 함께 어불려 놀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