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파도 위에서 떠올린 말
"나 진짜 그날만 보고 산다."
모이기로 했던 날을 2주 정도 남겨둔 시점, <독수리들> 단톡방은 빨리 보고 싶다, 할 말이 너무 많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 같은 절절한 그리움이 뚝뚝 떨어지는 말들로 도배가 된다. 적어도 두 달에 한 번은 꼭 만나면서 말이다. 1분이면 오가기 충분했던 앞집, 윗집에 이웃하며 살다가 기차나 시외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만큼 떨어져 살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그리움일 테다. 그래서 12월 크리스마스 즈음 만났던 우리는 또 2월 2일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가기로 했던 모임에 가지 못했던 건. 남자 친구나 부모님께도 말하지 못했던 속엣말들을 어떤 언어적 틀에 갇히지 않고 (그러니까 무자비한 비속어의 향연을 만들어내며)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박탈당한 것이다. 빌어먹을 파도, 빌어먹을 파도 때문에.
친구들 (a.k.a. 독수리들, 친구들이 5명이라 독수리라고 명명하게 되었다.)과 모이기로 한 날 일주일 전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울릉도 배 사정을 알고 있을 만한 모든 지인들에게 '일요일에 배 떠?' 하고 물었다. 기상청 홈페이지를 30분마다 한 번씩 들락날락하며 바다 날씨를 확인했다. 때마다 배가 뜬다는 사람들 반, 안 뜬다는 사람들 반인 데다가 바다 날씨도 오락가락이라 혼란스러움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애꿎은 모근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다. 일요일에 배가 뜨지 않으면 독수리들을 만나기로 했던 토요일에 나는 아침 배를 타고 울릉도로 가야 했기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었다.
결국 배는 뜨지 않을 것 같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포항으로 내려가 울릉도로 향하는 선플라워 호에 몸을 실었다. 단톡방에 결국 배를 타야 한다고 말하려는데 1년간 원양어선 타고 집 떠나는 사람도 아니고 이 상황이 어찌나 어이없고 억울하고 거지 같은지 눈물이 다 나려고 했다. 이 나이에 친구들 못 만난다고 슬퍼서 울려고 하는 게 쪽팔려서 더 서글퍼졌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배에 올랐는데 문득 리스본에서 만났던 유리 언니가 떠올랐다. 언니를 처음 만난 건 독수리들과 함께 스페인 포르투갈로 여행을 떠났을 때, 세비야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어스름한 새벽에 도착했던 리스본의 한 호스텔에서였다. 이른 시간부터 호스텔 로비에서 호스트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동양인 여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유리 언니였다. 혼자 여행을 온 언니는 꾀죄죄한 몰골로 호스텔에 입성해 농도 짙은 부산 사투리로 피곤함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던 우리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한국인이에요?'
를 시작으로 반갑다는 인사를 건넨 뒤 호스트가 우리 체크인 시간을 확인해줄 동안 소파에 쪼르르 앉아 담소를 이어갔다. 학생이에요? 어디서 왔어요? 여행은 언제부터 시작했어요? 지친 와중에도 언니가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아 묻는 말에 미주알고주알 대답했다. 알고 보니 언니는 우리와 몇 가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언니는 파리에 사는 포토그래퍼였는데 본가가 우리가 살고 있던 부산이었고, 우리만큼 친하고 자주 놀러 다녔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함께 여행 다니는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친구들 생각이 난다며, 어릴 적에는 매일같이 붙어 다니면서 놀았는데 이제 각자 직장을 구하고 떨어져 살다 보니 자주 만날 기회가 없어 자연스레 멀어졌다고 말했다.
그때 갑자기 코 끝이 시큰해졌다. 옆을 보니 민지는 이미 울고 있었다. 왠지 안심된 나도 그제야 마음 놓고 눈물을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함께 여행을 떠난 그 해는 대학교 졸업을 앞둔 4학년 마지막 해였고, 대학생이라는 같은 꼬리표를 떼어내고 각자의 꼬리표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갈림길에 나란히 서있을 때였다. 그때마다 우리는 절대 그저 그런 대학 동기 (우리는 스무 살 때 만난 대학 동기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대학 동기라고 소개하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가 되지 말자고 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런 대학 동기처럼 멀어지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었다.
마침 유리 언니가 그 마음을 건든 것이다. 우리는 고해성사라도 하듯 언니에게 걱정거리들을 풀어놓았다. 곧 졸업하고 각자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서 살게 될 텐데 우리도 그렇게 멀어질까 봐 무섭다고, 유진이라고 함께 오지 못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데리고 오지 못해서 마음이 무겁다고, 이런 크고 작은 일들이 모여 다섯 명이 함께 하지 못하는 날들이 오게 될까 봐 걱정스럽다고.
언니는 만날 수 있는 친구들끼리 계속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자취방을 떠나 각자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면 다섯 명이 함께 모이는 날을 잡기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고, 다 같이 만날 수 있을 때를 기다리다가 결국 한 번도 만나지 못해 소원한 사이가 되어버린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는 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뒤에 이어진 언니의 말, 시간이 맞는 친구들끼리 계속 만나야 그때 오지 못했던 친구들이 언제든 편하게 그 모임에 다시 올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진다는 말이 가슴속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어 한참을 그 웅덩이에 빠져 헤엄쳤다.
만날 수 있을 때 만나야 한다. 꽃이 시들지 않게 조금씩 물을 주고 빛을 쬐어 주듯 관계도 시들지 않게 돌아가면서 물을 주고 빛을 쬐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모두의 시간이 맞지 않다고 그 일을 소홀히 하면 결국 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생각이 이곳까지 미치고 나니 방금까지 내가 건너고 있는 거친 파도만큼 울화로 울렁이던 마음에 시간의 흙먼지로 메워진 그 날의 웅덩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다음의 만남으로 건너갈 수 있게 수많은 소주 맥주병과 음주가무로 장식된 오늘의 모임으로 열심히 징검다리를 놓고 있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속상해할 나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알딸딸한 와중에도 영상 통화를 걸어 잠시나마 함께 하는 기분을 만들어주는 친구들이 뿌듯했다.
이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내가 모임에 가지 못하는 일이 생겨도 아쉽긴 하겠지만 오늘만큼 속상하거나 서글프지는 않겠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다음이 있을 테니까. 그래도 3월에 있을 유진이 생일에는 절대 빠지지 않을 테다. 2번 연속이나 독수리를 만나지 못하는 건, 그건 너무 악몽 같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