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이 최우선인 시골에서의 확고한 옷 스타일
회사를 다니면서 옷차림에 꽤나 신경을 쓰곤 했다. 복장에 엄격한 기준이 있는 회사는 아니어서 정장 같은 불편한 옷을 자주 입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중요한 행사나 보고가 있을 때는 포멀해 보이는 원피스를 고수했다. 캐주얼한 옷을 입을 때도 최대한 깔끔해 보이도록 했고, 너무 화려하거나 품이 넉넉한 디자인의 티셔츠나 바지는 피했다.
화장도 매일 했다. 매일 아침 머리를 감고 기초 화장품을 챙겨 바르고 렌즈를 끼고 눈 화장이며, 파운데이션에 블러셔까지 챙겨 바르고 앞머리는 볼륨 있어 보이게 고데기를 했다. 집을 나서기 직전에는 신발장 위 보석함에서 반지와 귀걸이를 찾아 끼고 걸고, 향수를 뿌렸다. 화장품 회사 디지털 전략 부문에서 일하고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출근 준비로 나를 부지런히 꾸미면서도 아침 식사는 하지 않았고, 회사 가는 길에 커피 같은 음료를 사다 대충 때웠다. 꽉 끼는 치마나 바지를 입어서 소화가 잘 안될 때는 먹는 음식량을 줄였다. 어차피 속이 안 좋으니 그리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안 보이도록 몰래 바지의 단추를 하나 풀거나 치마의 지퍼를 조금 내리고 잠시나마 편하게 있기도 했다. 모니터 속 엑셀을 뚫어져라 봐야 해서 눈이 아플 때는 렌즈를 빼고 안경을 썼다. 그리고는 퇴근할 때는 다시 렌즈를 꼈다. 항상 그런 루틴으로 지내다 보니 화장하지 않은 채 밖에 나가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주말에 혼자 카페에 책 읽으러 갈 때도 곱게 화장을 한 채였다.
복장과 머리 모양, 화장 등을 포함한 아웃핏이 그 사람의 행동까지 만든다.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에 굽 높은 구두를 신으면 절로 보폭이 좁아지고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진다. 과감하고 빠르게 행동하기 힘들다. 불편한 옷 때문에 만성적인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눈 화장을 신경 써서 한 날은 혹시나 아이라인이 번지지나 않을지 걱정하며 몇 번이고 거울을 보고 눈에 주름이 가게 웃지도 않는다. 왁스며 포마드로 말쑥하게 머리칼을 넘긴 회사 동료들도 바람이라도 세게 부는 날이면 머리 모양이 망가지지는 않았는지 사무실로 돌아와 거울을 보며 매만지기 바쁘다.
본인이 지향하는 아름다운 아웃핏에 걸맞게 꾸미는 것을 즐기는 이들도 많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TV나 잡지 나오는 잘빠진 젊은 모델들이 멋진 슈트를 입고 관능적인 입술 화장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광고가 한 때는 멋졌지만, 이제는 그 제품을 사고 싶다는 감흥이 없다. 잠시의 기분전환이라면 모르지만. 나는 이제 불편함을 주는 아웃핏과는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 시작이 바로 이 시골생활이었다. 전에는 집 근처 슈퍼에 잠깐 갈 때도 강박적으로 화장을 하거나 구두를 신었는데,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정작 다른 사람들은 지나가는 나에게 그렇게 관심도 없는데 말이다. 시골은 도시만큼 사람들이 많지 않고, 거의 대부분이 내가 잘 모르는 어르신들이라서 굳이 나를 꾸며가며 집 밖을 나서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시골에서의 할 일이란 거의 대부분 마당을 청소하거나 모종을 심거나, 뿌꾸와 함께 산책하는 아주 활동적인 일들이었기 때문에 서울에서처럼 치마나 스키니진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었다. 굽 있는 샌들을 신고 뿌꾸와 산책이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몇 걸음 못 가서 발목을 삐끗하고 말 거다.
집에 있을 때의 나의 아웃핏은 이렇다. 시골의 공기는 맑아 햇살이 더 직접적으로 내리쬐는 느낌이기 때문에 선크림은 필수다. 마당일을 할 때는 아빠 마련해주신 밀짚모자도 써야 목덜미가 햇빛에 타서 벌겋게 익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렌즈 낀 눈에 폴폴 날리는 잔디나 흙먼지가 들어가면 눈물 나게 아프기 때문에 항상 안경을 쓴다. 바지는 폭이 넓되 허리 부분은 고무 밴드로 되어있는 게 활동성이 좋고 편하다. 뿌꾸 밥을 주거나 빨래를 널거나 대추를 말리거나 하는 간단한 일을 할 때에는 수면바지를 입고 하기도 한다. 어느 패셔니스타가 행사 때 수면바지를 입고 한 번 나와주면 좋겠다, 유행처럼 번져서 사람들이 모두 밖에서도 수면바지를 입고 다닐 수 있도록. 수면바지는 품이 넉넉하고 도톰하고 폭신해서 밖에서 활동할 때 입으면 편안하다.
윗도리는 주로 얇은 긴팔 티셔츠를 입고 공기가 좀 차다 싶을 때는 후드 집업을 덧입는다. 찬 공기를 오래 마시면 편도선이 잘 붓는 편이기 때문에 면으로 된 손수건을 접어서 목에 두른다. 신발은 주로 슬리퍼를 신는다. 그리고 수면양말을 항상 신고 다닌다. 아직 보일러를 틀기 전인 우리 집 원목 바닥이 차갑기 때문에 수면양말을 신고 다니면 따뜻해서 좋다. 그리고 수면 양말에 슬리퍼를 신고 마당에 나가면 풀 부스러기가 슬리퍼 안으로 들어와도 도톰한 양말이 발을 감싸줘서 발바닥이 따갑지 않다. 얇은 발목 양말에 슬리퍼를 신고 마당을 걸어 다녀보니 뾰족한 잔디가 발을 온통 찔러대는 통에 신경이 쓰였는데, 몇 번의 시행착오 후에 찾은 최고의 조합이랄까.
모종을 심거나 밭을 다듬는 것처럼 맘먹고 일을 해야 할 때는 장화를 신는다. 흙이나 벌레를 막아주는 제일 믿음직하고 튼튼한 신발이다. 밖에서 한 시간 이상 일을 할 때는 햇빛에 타거나 벌레에 물리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온 몸을 꽁꽁 싸맨다. 흙이 마구 묻거나 약간 망가져도 되는 옷들을 입는데, 매우 이상한 색 조합으로 되는대로 입고 마당에서 일하는 내 모습을 보면 사실 약간 웃기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 서울의 친구들은 뭐라고 할까 싶기도 하다. 일단 우리 엄마부터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잔디를 열심히 깎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웃으시는 걸 보면, 아무래도 시골에서 일하는 복장은 친구들에게 숨기는 게 맞는 것 같다.
시골에 있으면서 그나마 가장 자주 외출하는 곳은 도서관이다. 때때로 친구를 만나러 시내 쪽으로 나가기도 한다. 버스를 타고 가야 할뿐더러, 붐비는 곳에 간다는 명목도 있기 때문에 편안함이 최우선인 집에서의 옷차림보다는 더 신경을 쓴다. 하지만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정도로만 관리한다는 게 이전과의 다른 점이다. 일자바지에 편안한 티셔츠, 운도화에 배낭을 멘다. 말끔히 세수한 얼굴에 선크림을 바르고 컬러 립밤 정도로 마무리한다. 색조화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내 외출 준비 시간은 10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훅 줄어들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아주 편안하다. 음료를 마시다가 얼굴에 튀기라도 하면 휴지로 슥슥 닦아내면 되고, 렌즈를 끼지 않으니 눈이 건조하지 않고 머리도 안 아프다. 아량이 넓은 고무줄 바지가 맛있는 밥을 먹은 만큼 나온 내 배와 함께 늘어나 주기 때문에 속이 더부룩하지 않다. 액세서리를 하지 않은 손에는 핸드크림만 슥슥 바른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나 친구와의 대화에 더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운동화를 신으니 오래 걷는 것에 대한 부담이 없어서 여기 밥집을 갔다가 저기 카페를 가는 것도 가능해졌다. 서울에서의 작은 토트백이 아닌, 큼지막한 배낭 속에는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도록 좋아하는 책이 몇 권 들어있다.
화려하게 꾸미는 사람이 아니라 깔끔하고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에게는 그 편이 더 잘 맞는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은 원래 예민한 구석이 있으니 유행이나 타인의 시선에 쫓기지 말고 한 숨 여유 있는 삶을 사는 게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까. 시골에서 머물면서 아웃핏에 대한 강박을 풀어냈으니, 스스로 조금은 더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