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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효진 Sep 04. 2024

워킹맘이 행복하려면 내 이름을 찾아라

비로소 행복지도를 만드는 세 번째: 개인성장 및 자기 발전

서른에 석사공부를 하러 대학원에 들어가 파란만장한 조교 생활을 했더랬다. 밤을 새우며 과제하는 날이 많았고 매번 수업 토론에서 깨지며 2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돈이나 벌걸 왜 이 고생을 비싼 등록금을 내고 할까 싶은 적도 많았다.


그때 석사를 그것도 일반대학원에서 시작하게 된 것은 여자들에게 사춘기 다음으로 찾아온다는 서른 춘기 중 사건하나 때문이었다. 학원선생으로 경력을 쌓아나가고 있을 즈음 특목고반 출신 학생이 대학생이 되어 스승의 날 찾아왔다. 그 친구는 조만간 해외 유학도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마침 그날도 그 아이가 학원에 다닐 때와 같은 수업을 할 예정이었다. 문득 점점 성장하는 아이들에 비해 매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수업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답답하다고 느껴졌다. 서른 춘기, 여자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안정기에 들어서는 순간 찾아오는 자아 찾기의 대장정의 욕구 그 시기에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눈떠 보니 나는 풀타임 일반 대학원에 들어가 있었다. 전공도 인문학으로 문화를 연구하는 문화콘텐츠학과였다. 처음 선생님들은 공학 출신이라 그런지 사고방식도 다르고 눈치도 코치도 없는 제자 때문에 고민이 많으셨다. 선생님들은 학문적으로, 생활습관이나 기본적인 매너 하나하나 가르침을 아끼지 않으셨다.



비로소 행복지도를 만드는 세 번째 요소는 개인성장 및 자기 발전이다.



석사학위를 받고 얼마 후에 '비로소'라는 문화기획 회사를 만들었다. 연구소처럼 '소'로 끝나니 나의 직함은 소장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비로소 소장으로 부르며 일했다. 에어비앤비 같은 공간 공유, 경험공유 플랫폼 초창기 성장세에 있을 때 파트너 위치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운이 좋게 작은 공간을 운영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이런저런 이벤트를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었다. 공간을 빌려주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워크숍이나 파티 주최자와 알게 되면서 문화와 예술과 관련한 자유로움에 잠시 빠져들 수 있었다.


그러나 초보 사장에게 세상이 녹록할 리가 없었다. 회계와 같은 회사운영의 기본적인 부분도 어려웠고 비즈니스 모델을 시장에서 확인해 볼 수 있을 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회사 운영을 쉬고 나의 능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잔잔한 물결 같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결혼은 내가 개인의 시간으로 삼았던 건강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시간 외에 가정을 가꾸는 새로운 시간이 내게 들어온 것을 의미했다. 내가 사회적이고 경제적 활동을 하던 것에서의 의사 결정에서 시간의 사용이나 물리적 행동에 따라 남편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신혼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남편에게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싶다고 말하였다. 비로소를 좀 더 전문적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물론 다른 자격과 경험도 충실히 쌓아보고 싶다는 포부가 그 어느 때 보다 높았다.  


문화콘텐츠학은 복합학이라서 학사석사에 이어 바로 박사를 오는 학생들 수보다 사회적으로, 학술적으로 이미 경력이 많은 분들이 많이 계셨다. 나는 그 속에서 위축되었만 그럴수록 더 학술적으로 깊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시간이 흘러 3학기 마지막 무렵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노산축에 들어서 시기적으로 임신소식은 분명 반가운 것이었지만 나의 원대한 계획에서 만큼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되고 말았다. 입덧도 고약해서 1시간도 책을 보고 앉아있기 힘들었다. 기말 과제는 물론이고 다음학기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배가 점점 불러오면서도 학교에 다녔다. 주변에서는 이것만큼 좋은 태교가 어디 있겠냐고 덕담을 해주셨다. 임신초반의 입덧이 사라지고 나니 살 것 같았고 아이를 낳은 이후의 삶을 위해서라도 지금 이 순간을 더 알뜰하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어렵사리 박사과정을 수료하였고 아이는 여름방학에 세상에 나왔다. 학위 논문을 위한 연구 학기에는 휴학하면서 아이를 돌봤다. 1년간은 장효진이 아닌 진주 엄마로서 살기로 했다. 처음으로 내가 계획한 대로 삶이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던 순간이었다. 출산과 육아로 그동안 차고 넘치던 나만의 시간에 대한 갈증이 밀려왔다. 한없이 부족하기만 한 엄마를 세상의 전부로 아는 한 아이를 책임저야 한다는 무게감이 점점 커졌다.




비로소 소장 장효진입니다.


아이가 돌이 될 때까지 아이와 충분히 밀착 관계의 시간을 보냈다. 남편은 멀리 출장을 다녀오기도 하고 부모님은 시골 멀리 사시기 때문에 홀로 아이를 돌봐야 하는 시간도 많았다. 그렇지만 돌이 되어 모유 수유를 그만두기로 한 이후에는 정말 칼처럼 이유식으로 바꾸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취업을 하였다.


박사 수료자로서 아이의 엄마라는 큰 경험을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비로소라는 작은 회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을 져본 사람으로서 장효진을 궁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후 학교와 회사생활을 경험한 이력을 바탕으로 한 대학에서 산학협력 과제 프로젝트 연구원으로 채용되어 논문, 콘텐츠 기획과 제작, 특허등록 등을 경험할 수 있었다. 프로젝트 결과 만들어진 논문과 특허를 바탕으로 나의 연구 주제를 탐색하고 그것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고 학교와 회사를 다니며 워킹맘 생활을 하면서 아침 출근길 7시 반에 맡겼다가 야근 후 9시가 넘어서 데리러 가는 날에는 엄마로서의 자격에 대해 스스로 낙제점을 매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일찍 퇴근 한 날 외식으로 맞는 즐거운 시간, 주말 나들이에서 비눗방울을 날리며 까르르 웃는 우리 가족은 불행하다고 여길 이유가 없었다.


아이의 성장과 보육은 나보다 전문가인 분들에게 의지하되 아이의 정서적 애착만큼은 놓지 않겠다고 나름의 합의를 보았던 터였다. 아이와 손잡고 산책하기, 아이와 낙엽을 모아서 책갈피로 만들기, 아이 한글공부, 아이 자전거 타기, 아이 첫 홀로 등교하기 등의 미션에서 마음 설렘과 걱정의 단계를 모두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도 선생님은 내가 필요한 일을 찾아내고 취업하거나 창업하는 모습을 신기하다 하셨다. 그것은 내가 남들이 보기에 좋은 길이라고 여겨지는 길로 가지 않고 내가 결정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어느 직장에 다니는 근로자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의 가치를 만들고 그에 맞는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과가 거창하지는 못하더라도 지금까지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보고 관심 있는 분야를 계발하고 관계에서 문제점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도전을 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비로소 소장으로서 장효진을 이야기할 수 있고 앞으로도 좀 더 크게 이름을 말할 수 잇었으면 좋겠다.



개인성장 및 자기 발전의 시간은 객관적인 기준과 체계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개인성장 및 자기 발전의 시간은 앞선 사회적 활동의 시간과도 연관 있다. 기존 나의 일의 연장선상이라면 내가 수준을 높이기 위한 로드맵을 비교적 쉽게 구상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길에서 비전을 찾아보고자 한다면 느슨한 관계를 통한 새로운 경험을 통해 나의 역량이나 재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학원강사 시절 플로리스트 자격증을 따거나 경매 관련 재테크 수업을 들으면서 학원 강사 이외에 경제적으로, 직업적으로 앞으로 미래에 내 모습을 그려보는 시간을 많이 가졌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대학원을 진학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나의 삶은 많은 부분 달라졌다.


개인성정 및 자기 발전의 시간은 좀 더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워킹맘으로서 자기 발견과 계발의 시간은 객관적으로 성공가능성과 투입대비 효과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필요하다. 수료, 자격증, 학위와 같은 성과물이 있는지와 그것을 통해 전문적인 활동의 효력이 얼마만큼인지에 대한 것들이다. 또한 최소한의 시간 이외에 투자할 수 있는 기간과 비용, 시간도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당장 여의치 않다면 이러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준비기간과 그 기간 동안 해야 할 것들을 계획해야 한다. 


남편은 내가 박사학위를 받는 기간 동안 내가 최소한의 용돈을 충당하도록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과 학위를 받은 후의 노년까지 가져갈 전문가로서 비전을 이야기하며 설득할 수 있었다. 한번 납득한 남편은 푸념이나 비판을 하지 않았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거의 마지막 두 달 밤을 새우며 피폐해진 아내를 극진히 외조해 주었다. 퇴근해서 아이를 전담 마크하고 주말에는 시골로 키즈카페로 유랑하였다.


아이는 엄마의 프로페셔널하고 미래지향적인 모습을 보고 자기 삶의 모델을 설정한다. 가정을 살뜰하게 돌보는 것만큼이나 엄마가 자기 개인의 삶을 돌보고 사회적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자기의 미래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아이는 그 경험을 통해 돈으로 살 수 없는 자산을 물려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엄마는 대학생 가르치는 선생님이잖아', '엄마가 대장이야' 라는 말을 해주면 내가 나의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남편은 가정에서의 책임감을 나누어 가지는 아내가 예쁘다. 자기 역량을 발전시키고 나아가 그것으로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더없이 매력적이다. 남편도 무기력을 경험하고 사회활동의 피로를 많이 느낄 것이다. 그럴 때 아내가 든든하게 기댈 수 있다면 안정감이 든다.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안식을 취하고 다른 적성을 탐색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앞으로 5년 후의 모습을 상상하면 어떤 모습일지 이야기해 보자. 그 모습을 위해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찾아보자. 안 되는 것은 없다. 방법을 찾으면 길이 열린다. 꿈은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면 현실로 바꿀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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