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깻잎 논쟁'에 대한 소회
오랜만에 먹는 엄마의 집밥이다. 밖에서 짠 음식을 자주 먹어서일까, 아니면 엄마 몸이 안 좋아져서일까? 국이고 반찬이고 다들 싱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깻잎 장아찌는 여전해서 반갑다. 깻잎을 한웅큼 집었다가, 국물이 떨어질 것 같아 그 자리에 다시 내려 놓는다. 내려 놓았던 깻잎을 다시 집고는, 국물을 툭툭 털어낸 다음 내 밥그릇으로 가져온다. 엄마가 옆에서 말한다. “집에서는 괜찮은데, 바깥에서는 그렇게 반찬 털어 먹으면 안 된다. 뒤적거리거나 해서도 안 되고. 엄마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생각해 보면, 이런 말은 엄마보다 아빠가 더 많이 하지 않았나 싶다. “아주 교양 없는 사람들이나 반찬 뒤적거리는 거거든.” 고기 굽는 아빠를 도우려 할 때도 아빠는 종종 말했다. “집게 든 사람 말고는 고기 뒤집는 거 아니야. 몰상식한 행동이야.” 집게 쥔 사람의 수고를 덜고자 젓가락으로 거드는, 일종의 코워크 정도로 봐줄 법도 한데. 아빠는 남의 입에 들어갔던 젓가락이, 삼겹살에, 그러니까 자기 입으로 들어갈 그 삼겹살에 닿는다는 사실이 꽤나 불쾌했던 모양이다.
구내 식당에서는 젓가락 짝이 맞지 않을 때가 많다. 어느 하나가 휘어 있을 때도 있고, 길거나 짧을 때도 있고, 더 굵거나 얇을 때도 있다. 수저통 앞에서 짝을 맞추고 오면 좋으련만. 내 손에 닿은 젓가락이 통에 다시 들어간다 생각하니,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젓가락을 늘 세 개씩 집는다. 물론, 세 개로 해결이 안 될 때도 있지만.
엄마 때문인 건지, 아빠 때문인 건지, 나는 반찬을 뒤적이지 않는다. 적어도 밖에서는, 완벽하진 않더라도 그런 시늉을 하고 있달까? 숫가락으로든 젓가락으로든, 아무튼 반찬을 뒤적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죄책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싸가지가 없니 사회성이 없니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고기 굽는 일에 웬만해선 손을 보태려 하지 않는다. 굳이 도울라치면 수저통을 찾아 새 젓가락을 꺼냈을 테다. 다행히,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난 몇 년 간은 내 고기 굽기 수칙이, 누구든 마땅히 준수해야 하는 일 정도로 이해되었다. 지금은 다시 아닌 걸로 된 것 같긴 하지만.
나만 그러면 괜찮을 텐데. 사실, 남이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건 마찬가지이다. 한 번 만진 숫가락을 다시 통에 넣는 사람을 본다거나, 자기 입에 넣었던 젓가락으로 고기를 뒤집는 사람을 본다거나, 먹고 싶은 것을 집느라 반찬이나 찌게를 뒤적이는 사람을 본다거나 하면 엄마 아빠의 말이 떠오르니 말이다. 아주 잠깐 스쳐지나갔다 하더라도, 아무튼 그 마음이 썩 좋은 마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런 이들에게 불쾌해 하는 기색을 내비치진 않는다. 내게 일찍이 'ABC아파트 101동 1002호’라는 사회가 있었듯,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저마다 다른 이름의 사회가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문제’는 문제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는 식으로 스스로 최면을 걸어 본다. 그 성공률은 꽤나 높다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안 될 때가 가끔은 있다.
‘깻잎 논쟁’이란 말을 듣게 되었다. 자신의 애인이, 이성의 깻잎 집는 일을 젓가락으로 돕는 걸 참아줄 수 있냐 없냐가 쟁점이라 한다. 고작 깻잎 떼어 주는 일에 러브 따위의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찬성론과, 그 일은 침이 섞이는 내밀한 일이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반대론이 대립하고 있다고 한다.
‘너네, 그러다 아빠한테 혼난다.’ 그게 논쟁이 되었다는 말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두 장 아니 세 장이 되었다 하더라도, 일단 집히는 대로 자기 밥그릇으로 가져 갔으면 좋겠다. 애인 아닌 다른 사람과, 얇디얇은 깻잎 같은 사랑을 나누어도 좋다. 인류애 차원에서 힘을 보태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무튼 그 스테이지는 부디 당사자의 앞접시가 되었으면 한다. 앞접시에서는 혼자서 떼어 먹기도 쉽다는 점을 잊지 마시라. 나, ‘ABC아파트 101동 1002호’인(人)의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