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bonne heure
이 집에 2년 넘게 살면서도 필요성을 못 느끼던 온갖 청소도구들이 등장했다. 하얀 타일과 마룻바닥을 광이 나도록 닦고 주방 싱크대에 뿌옇게 쌓인 석회수의 흔적을 지워냈다. 소홀히 지나쳤기에 보이지 않았을 구석구석까지 몇 주에 걸쳐 닦고 애정을 주니 집 안 곳곳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각종 식기들도 사들였다. 가격 부담이 없으면서도 예쁜 것들로. 일단은 자주 사용할 머그잔과 메인디쉬를 사고 그다음은 커다란 일품요리 접시를, 마지막으로는 디저트용 디쉬들과 무게감이 느껴지는 유리컵들을 사다 날랐다. 차가 없으니 이것들을 여러 번에 나누어 사 왔는데 매번 새 그릇이 생길 때마다 미니는 그것들을 정성스럽게 씻고 말린 후 차곡차곡 정리해 두었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겐 처음이다.
이 집에 산지도 어느새 2년 반, 어차피 우리 집도 아닌데 깨끗하게나 살자. 언젠가 떠날 집이니 짐을 늘리지 말고 최소한으로 살자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사용하던 식기의 90퍼센트 이상은 시엄마가 쓰시던 것이고 나머지는 노르웨이로 이사간 미니의 동료가 주고 간 그릇들, 우리가 직접 산 것이라곤 대형마트에서 급하게 구입해 매일 사용하던 메인디쉬 두 개가 전부였다. 신기하게도 주방 선반에 새로운 그릇들이 쌓여갈수록 그 위에 올려질 만한 음식들을 상상하는 것이 수월해졌고 미니는 매일 밤 저녁식사를 마친 후 돌아올 주간의 식단과 와인 리스트에 열을 올렸다. 얼마나 디테일하게 계획을 세워 나가는지 이런 남자과 함께 사는 어느 날 밤의 나는 유난히 피곤하기도 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
생각해보면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요리란 별게 없었다. 전에 없던 대형 오븐의 등장과 둘이서 지지고 볶은 몇 년의 시간이 우리를 알아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성장시켜 준 걸까? 그때와 비교해 우리의 요리 실력은 못해도 200퍼센트 이상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자부한다. 요리에 자신감이 붙은 후론 먹고 싶은 음식은 집에서 다 해 먹고 집밥이 웬만한 레스토랑 음식보다 훨씬 맛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멀리서 오시는 손님들이 맛있게 먹을 만한 음식 혹은 프랑스에서 꼭 맛봤으면 하는 메뉴들을 고심하고 고르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한편으론 엑셀 펴고 날짜별로 식단 짜는 미니가 피곤함을 자처한다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고 우리 엄마, 내 동생이 오는 건데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불필요한 소모라며 타박했다. 결론적으론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러울 만큼 미니에게 고맙다. 퇴근하기가 무섭게 매일 밤 장 봐다가 요리해주고 설거지까지 해 준 미니 덕분에 우리 세 모녀는 마음 편히 파리 곳곳을 누볐고 엄마랑 동생은 즐겁게 먹고 마시고 돼지 풍선이 되어 한국으로 훨훨 날아갔다.
미니의 식사 준비는 어느 일요일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2주 차에는 넷이서 프라하 여행이 예정되어 있던 터라 휴가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엄마와 동생이 도착하는 월요일 아침엔 출근을 해야만 했다. 고민끝에 월요일 저녁 메뉴로 정해둔 뵈프부기뇽을 미리 만들어 두기로 했고 일요일 오후 대부분을 주방에서 보냈다. 평소보다 더 좋은 고기를 고르고 더 비싼 와인을 사고 긴 시간 정성 들여 요리를 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이 되자 아무래도 이번 뵈프부기뇽은 실패한 것 같다는 거다. 이유를 물으니 아침에 살짝 배탈이 난 것 같은데 명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요리하면서 시식을 많이 했으니 고기의 문제가 아니겠냐고 한다. 그리곤 앞서 공항으로 나가는 나에게 퇴근 후에 본인이 버릴 테니 절대 손대지 말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다.
샤를 드 골 공항에서 꿈같은 재회를 하고 처음으로 우리 집을 방문한 엄마랑 동생은 무겁게 싸들고 온 것들을 보여 주려는 설렘에 가방을 풀기에 바빴다. 미니가 테이블 위에 깜찍하게 준비해 둔 쿠키를 먹고 밀린 이야기들을 하다가 잠깐 눈을 붙이니 허기가 밀려왔다. 나의 원 계획은 베이컨과 토마토가 들어간 시금치 키쉬를 구워 대접하는 것이었으나 미니의 뵈프부기뇽 얘기를 들은 엄마는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을 어떻게 맛도 안 보고 버리냐며 한사코 고집을 피우셨다. 동생도 덩달아 본인이 한 번 먹어보겠다고 막무가내여서 나는 파스타 면을 삶고 뜨끈하게 데운 문제의 음식을 (미니 몰래) 늦은 점심으로 내놓았다. 사실 미니는 위장이 굉장히 예민한데 반해 우리 세 모녀는 강철 위장을 타고났기에 그거 몇 점 먹는다고 별 일이나 있을까 싶은 맘이 내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음식은 맛있었고 우리의 위장은 아무 탈 없이 그것들을 잘만 소화시켰다.
셋이서 맛있게 먹고 나서 엄마는 « 너 몰래 우리가 먹었다고 해. » « 시킨 대로 버렸다고 해. 뱃속에다 » 라며 한바탕 깔깔깔. 이쁜 것이 맘도 이쁘고 요리도 잘 한다며 칭찬 한 다발은 보너스. 미니는 도대체 뭐 때문에 배가 아팠던 거지? 어쨌거나 남편의 빛나는 요리 솜씨 덕에 도착 첫날부터 이렇게 돼지 풍선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정말 인간이 이렇게까지 먹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먹고 마신 3주. 그런데도 시간이 부족해 함께 못 먹은 음식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같이 마시려고 준비해 둔 와인들도 아직 몇 병 더 남아있고.
유럽 여행 경험이 있는 동생과 달리 엄마는 파리가 (유럽이) 처음이었다. 도대체 어디를 가야 가장 좋아하실까 궁금했었는데 그 반응이 너무 명확해서 두 번 물을 것조차 없었다. 에펠타워만 가면 온갖 감탄사를 쏟아내셨고,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하루는 시부모님께서 야경 드라이브를 시켜주셨는데 따로 부탁드리지 않아도 에펠 타워 앞에서 우리들을 내려주시고 충분히 감상하고 기념사진을 찍도록 배려해 주셨다.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기에 관광객이 떠난 한산한 에펠타워는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던 센 강과 어울려 평소의 몇 배로 빛이 났다. 결국 너무 기뻐서 정신 못 차리는 엄마를 잡아끌고 그곳을 떠나야만 했고 그런 엄마를 보는 우리들도 왠지 모르게 신이 났던 밤.
갑자기 해가 쨍하게 비치던 오후 보쥬 광장에서 낮잠을 자고, 나무들이 울창한 베르시 공원에서 일광욕을 하고, 화단 가득 가을빛 꽃이 만발한 룩성부흐 정원에서 커피를 마셨다. 몽마르뜨 언덕에서는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무명가수의 노래를 음미하며 맥주를 마셨고, 비가 내리던 어느 일요일엔 오랑제리 미술관 모네의 수련 앞에서 한참을 보냈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카페테라스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하고, 햇빛이 비추면 자리 펴고 앉아 못다 한 담소를 나누던 나날들. 그 평화로운 시간들이 지나고 어느새 마지막 날이 왔다. 동네 레바논 음식점에서 내가 먹어본 중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팔라펠 샌드위치를 사고 집 앞 마트에서 와인과 코코넛 워터, 무화과를 사들고 에펠타워로 향했다. 운 좋게 날씨까지 받쳐주니 파리에서의 마지막 오후로 완벽한 그림이었다.
잔디밭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트로카데로 광장 쪽으로 걸어가는 길에 엄마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에펠 타워를 가슴에 담았다. 왜 그렇게 에펠타워가 좋냐고 묻는 내게 엄마는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며 수줍게 웃었다.
나에게 파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꼭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면 그저 미니가 태어나고 자란 곳 정도? 그런 파리를 한국에서 온 나의 가족들이 아름답다고 했다. 가끔 들르는 카페테라스, 좋아하는 레스토랑, 집 앞 슈퍼마켓, 동네 지하철역, 심지어 집 근처 골목 어귀에도 그녀들이 서려있다. 이제 가족을 생각할 때 기억 속 저 깊숙한 곳까지 손을 뻗어 한국에서의 오랜 추억들을 끄집어내지 않아도 된다. 내게 파리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었다. 공항으로 향하던 아침, 정말 별 볼 일 없는 아파트 앞 화단에서 지하철역 앞에서 사진을 찍던 동생에게 이 곳이 특별하게 기억될 것처럼… 내게 파리도 가장 따뜻한 기억 한 조각이 되었다.
가족과 함께 보낸 3주는 평화롭지만 빠르게 지나갔다. 엄마와 동생이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일찍 집을 나섰는데도 공항에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아서 마음이 조급했다. 마카롱이라도 사서 넷이 나눠먹자고 수줍게 말하는 동생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게이트까지 가는 길에 시간에 쫓길까 염려가 되어 정신없이 등 떠밀어 보냈다. 함께 있던 미니에게 미안하게도 엄마랑 동생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니 나 혼자 덩그러니 남은 것 같은 서러움이 거세게 밀려왔다. 나는 이국땅에 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고 사색을 즐기는 성격이라 향수병 같은 것도 없고 얼마나 행운인가 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동안 나는 보편적 외로움을 여유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어디서든 잘 적응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남보다 쉬운 류의 사람일 뿐인 걸까. 좀 더 다정하지 못했던 것이, 얼굴에 피곤함을 드러낸 것이, 더 많은 경험을 하게 해 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마음이 그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미니가 끓여준 뜨끈한 라면을 먹고 한 숨 자고 일어나서야 동생이 주고 간 엽서를 읽었다. 많은 것을 함께 했고 그래서 즐거웠다는 말이 큰 위안이 된다.
요즘 한국 사람들은 여행을 참 자주 하는 것 같다. 유럽 어딜 가도 한국 관광객들이 많은 이 풍경이 신기하다. 물론 예전에도 여행자들은 많았을 것이고 내가 비교적 부유하지 않아서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난 프랑스가 맘만 먹으면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행기며 호텔이며 한국보다 비싼 외식비까지… 비용면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한국의 휴가 시스템상으로 맘 편히 오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엄마랑 동생에게 정말 고맙다. 수개월 전부터 계획을 짜고 3주라는 긴 시간을 비워서 나와 미니를 보러 와 주었다는 사실이.
예상치 못한 허전함은 생각보다 느리게 그러나 잔잔히 메워지는 중이다. 멀리서 온 손님들은 돌아갔지만 미니와 나는 여전히 마룻바닥에 광을 내고 전보다 신경 써서 새 그릇에 예쁘게 음식을 담아 먹는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가족들과 함께 한 여행, 넷이서 웃고 떠들던 그 짧은 시간들이 마치 어제였던 것처럼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스며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린 지금 사는 이 집에 좀 더 마음을 주고 싶어 졌다. 생각해보면 애정의 시작은 아마도 여름의 끝자락 언젠가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 집을 보여준다는 설레임으로 정성껏 쓸고 닦던 그 날들로부터…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켜는 이 순간 내가 숨 쉬고 있는 곳.
비록 우리의 소유는 아닐지라도 소중한 사람들과의 기억으로 알록달록 채워진 이 곳.
미니와 내가 함께 성장해가는 이 작은 공간에 또 하나의 오늘이 물들어간다.
이제 아쉬움은 뒤로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 그대와 나의 첫 번째 우리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