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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Feb 04. 2022

전 넉살 좋은 덕선이가 아닙니다만

지랄 맞은 독일어에 욕만 주야장천



한국 드라마 베스트 파이브를 꼽는다면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은 몇 위쯤 될까요. 박해영 작가의〈나의 아저씨〉와 김수현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 그리고 〈미생〉과 〈슬기로운 의사 생활〉까지, 순위를 매기기 어려워요. 한국에서 본 응팔은 독일 사는 5년 동안 두 번이나 더 봤으니 3위 안에는 들겠네요. 볼 때마다 웃기고 콧물 찡한 부분이 자꾸 나와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드라마의 힘인가 봐요.      


언제 어디서나 분위기 메이커인 덕선이는 바둑계의 신으로 불리는 택이를 따라 중국에 가요. 중국어를 전혀 못 하는 덕선이가 호텔 프런트에서 팔뚝으로 엑스 표시를 하면서 "화장실 고장, 밤새 물이 졸졸졸 한숨도 못 잤어. 오케이? 너무 추워" 또 덜덜 떠는 시늉을 하며 "얼어 죽을 뻔했어"라고 온몸을 사용해서 의사소통하는 장면을 특별히 좋아해요.      




전 외국어를 크게 두려워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영어가 유창하진 않지만 외국인과의 대화도 서슴지 않고요. 강한 외향형은 아니지만 좋은 사람과의 만남에 큰 의미를 둬요. 영어가 가능하다는 건 또 다른 세상을 만날 기회를 얻는 거니까요. 잘하고 싶은 마음은 늘 있지만 극복하기 쉽지 않은 영어를 오랫동안 짝사랑했죠. 독일 오기 전, 마지막으로 살았던 경기도 양주는 미군 부대가 가까이에 있어서 미국인을 접할 기회가 종종 있었어요.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가비는 군인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살게 된, 아이 넷을 혼자 홈스쿨링 하는 엄마였어요.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면서 애들끼리도 자주 어울렸어요. 오누이도 외국인이든 영어든 거부감이 없길 바랐죠. 언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은 어떻게든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순간은 그렇게 빨리 올 리가 없으니까요.      


덕선이가 몸짓으로 하고 싶은 말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흉내 내며 오누이에게 자주 이야기해요. 말이 안 되면 손짓 발짓으로 하면 되고, 우린 한국어라는 병기가 있으니 절대 쫄지 말아라. 외국어를 잘하면 분명 편리하지만 모국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늘 강조하면서요. 하지만 드라마 속의 덕선이는 중국에 잠깐 들른 여행자였기에 별문제 없이 웃으며 상황이 끝났어요. 여행자와 거주자의 언어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이제야 깨달아요. 초반엔 자만했어요. 독일어, 까짓것 못할 게 뭐 있을까. 하면 되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데, 결과적으로 전 무식 쪽에 가까워요.     




독일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심한 감기에 걸렸어요. 병원은 처음인지라 가까운 곳을 검색해서 그중 한 곳에 남편이 전화를 걸었죠. 독일은 뭘 하든 약속(텔민Termin) 잡는 게 중요하니 미리 전화 예약이라도 해둘 요량으로요. 다행히 그날 와도 된다고 해서 구글 지도를 따라 병원을 찾아갔어요. 병원 건물이 일반 집과 비슷해서 여기가 맞나 여러 번 확인했고요. 문 옆에 병원명(그땐 보이지 않았던)과 의사 이름 그리고 초인종이 있어서 순간 이 벨을 눌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눌렀는데 찌찌 찍~하는 소리에 움찔하는 찰나 문이 딸깍 열렸어요.     


보험 카드를 접수하고 대기실에 들어가니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어요. 초심자 티 안 내려고 노력하며 얌전하게 한 시간이나 기다려 진료실로 들어갔는데 대뜸 의사가 이렇게 묻는 거예요. “임신하셨어요?” 두둥! 어쩐지 기다리면서도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긴 했어요. 임신부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작은 아이를 바구니에 넣어 데리고 온 엄마도 있었고 대부분이 여자였거든요. 남자가 한 명 있었는데 임신부 아내와 함께 온 남편이었어요. 언젠가 산부인과에서 진료 보기 위해 기다린 풍경과 흡사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했죠.     


결국 우린 한 시간이나 엉뚱한 곳에서 기다렸던 거예요. 그날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남편과 둘이서 웃고 말았지만 씁쓸했어요. 앞으로 우리가 독일에서 하게 될 수많은 허튼짓의 예고편일지도 몰라서요.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남편은 전화를 걸어서 대뜸 아내가 감기에 걸렸다. 진료 보러 가도 되냐고 했더니 된다고 했대요. 하긴 임산부도 감기에 걸리니까요. 산부인과에 전화를 걸었으니 당연히 와도 된다고 했겠죠. 온화한 인상으로 임신하셨어요?라고 물었던 의사가 알려 준 가정의학과 병원(하우스 아츠트 Hausarzt)으로 황당해하면서 갔던 기억이 나요.     




두 번째 허튼짓은 좀 웃겨요. 어느 유치원에서 외국인 엄마들을 위한 독일어 수업을 들었는데 마샤라는 폴란드인 친구를 만났어요. 개인적으로 만나기로 한 날, 그 친구가 약속 장소를 왓츠앱으로 보냈는데 분명 '부거 하우스 Burger Haus'였어요. 전 대번에 '아, 햄버거 가게구나.' 생각했어요. 언젠가 본 적이 있는 햄버거 가게를 떠올리고 가보니 '버거 그릴 Burger Grill'인 거예요. '어? 버거 하우스(독일어 발음은 버거가 아니고 부거)가 아니네.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뷰거 하우스 Bürger haus'를 잘못 보낸 거였어요. 독일어는 단어 위에 점 두 개(움라우트)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단어가 되거든요. 참고로 뷰거 Bürger는 시민이라는 뜻으로 뷰거하우스 Bürgerhaus는 시민회관이에요. 만나기로 한 친구가 Bürgerhaus에서 움라우트 유(ü)를 u로 쓰는 바람에 버거 집으로 오인했어요. 햄버거 집 앞에서 만나자는 줄 알고 속으로 나 버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생각했으니까요.     


세 번째는 좀 슬퍼요. 민망함을 넘어 분노를 뿜었던 날이고요. "독일어 싫어, 진짜 싫어. 머리 아파 미칠 것 같아.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데?" 수치스러워 죽을 것 같다고 울부짖은 날이에요. 독일어로 된 어떤 정보가 머릿속에 머무는 시간은 극히 짧아요. 좋아하는 노래 가사도 정확하게 기억하기 어렵고 어설픈 기억력을 못 믿어서 늘 뭔가를 적어야 안심인 사람인데 외국어, 그것도 독일어로 쓰인 중요 정보는 읽어도 까먹기 일쑤예요. 과연 내 머리 어딘가에 흔적이나 남을까 의심스러울 만큼요. 오누이가 다닌 유치원과 학교에서 보내는 안내문은 어쩌면 그렇게 많은지 한동안은 사전을 끌어안고 해석하느라 머리가 아팠어요.     


어느 정도 적응된 다음엔 꾀가 늘어서 대충 쓱 보면서 핵심만 파악하곤 했는데 그러다 중요 정보를 놓쳤어요. 딸이 유치원에서 공원으로 나들이 간다, 까지만 기억하고 귀가할 땐 부모가 직접 장소로 데리러 오라는 내용은 미처 파악을 못 한 거예요. 유치원에서 어디를 가는구나, 까지만 대충 보고 데리러 오라는 건 까마득히 몰랐어요. 끝나는 시간에 유치원으로 데리러 갔는데 아무도 없길래 늦나 했는데, 내 아이만 선생님 차를 타고 유치원으로 와서 만났어요. 나중엔 차도 없는데 어차피 잘된 일이라고 합리화를 했지만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날이었죠. 딸 표정도 침울해서 더 화가 났어요.     




위의 세 가지가 독일에 산 지 1년 안에 있었던 허튼짓 베스트 쓰리예요. 지나고 보니 이렇게 삽질의 추억을 쓰는 날이 오는군요. 역시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진리인 걸까요. 지금은 셀 수 없이 많아서 허튼짓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어요. 이제 어지간해서는 크게 부끄럽지도, 분노로 부르르 떨지도 마음이 다치지도 않아요. 그냥 외국 살이에서 당연한 일이라 여기며 지랄 맞은 독일어에 욕 한번 해주면서 살아요. 이러다 독일어가 느는 게 아니라 욕만 주야장천 늘지도 모르겠어요. 여행자와 거주자가 필요로 하는 언어의 간격은 생각보다 크고, 전 응팔의 주인공, 넉살 좋은 덕선이가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서요.


*북이오 프리즘에서 연재 중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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