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바지와 그을은 얼굴

by 김유진

열 살 아들 바지 무릎이 죄다 구멍이다. 땅바닥에 굴러도 너무 구른 모양이다. 에누리해서 오천 원 주고 산 바지가 구멍이 나서 세탁소에서 삼천 원을 주고 무릎을 기웠는데 다시 구멍이 났다. 천이 좋아서 웬만하면 닳기도 어려운 요즘에 녀석은 벌써 몇 벌째인지 모르겠다. 다른 집 애는 대부분 옷이 작아져서 못 입는다는데 우리 집은 작아지기도 전에 구멍이다.


며칠 전엔 절뚝거리면서 들어오길래 깜짝 놀라서 보니 바지뿐만 아니라 속에 입은 내복까지 기역 자로 찢어졌고 무릎엔 상처가 났다. 아이는 다친 일보다 바지가 찢어져서 혼날 일을 걱정하는 듯 보였다. 다친 데는 없는지 살펴보면서 어쩌다 이리되었냐고 물으니, 화단에 떨어진 공을 줍다가 나뭇등걸에 걸려 찢어졌단다. 아이코! 결국, 바지는 살리지 못하고 새로 산 지 며칠 되지 않은 내복은 바느질 서툰 내가 기웠다.


가끔은 아들 무릎엔 날카로운 가시가 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바지에 구멍이 쉽게 난다. 무릎으로 기어 다닐 나이도 아닌데 자꾸 구멍 나는 바지를 보며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하니 다 이유가 있단다. 축구를 할 때 주로 골키퍼를 하는 데 온몸을 던져 공을 막느라 무릎이 바닥에 끌리는 상황을 재연해 보여준다. 아이 동작을 보니 남아날 바지가 없겠다.




"아이를 그을리게 하라.

풀, 흙, 벌레를 만지게 하라.

더러운 옷을 입게 하라. 옷이 더러워지게 하라.

기게 하라. 구르게 하라. 뛰게 하라.

적당히 긁히거나 까져도 된다.

더 좋다.

회복되는 과정은 성숙과 인내를 배우게 하니"


오소희 글대로 우리 집 아이는 제대로 구르고 옷이 찢어지도록 노는 셈이다. 오전에 엄마들과 카페에서 오붓하게 로컬 독서 모임 한 날 녀석들을 데리고 주말농장에 갔다. 엘리자베스 퀴블로스의 <인생 수업>에서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 늦게 깨닫는다”라는 글귀처럼 지금 내 곁의 아이와 더 많이 웃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졌다. 좋아하는 일을 해서 에너지를 듬뿍 충전한 날은 자녀에게 줄 에너지가 더 많이 생긴다. 몸은 피곤해도 충만한 에너지로 마음이 든든해지면 집에 돌아온 아이가 반갑다.


매일 오후 세 시 반이면 어김없이 친구와 놀이 약속을 잡는 아들에게 선심 쓰는 마음으로 “오늘은 친구들도 데리고 씨알 농장에 가서 놀까?” 제안했다. 아이는 쾌재를 부르며 친구에게 알리러 나간다. 같은 단지에 사는 아이들은 금세 잠자리채까지 챙겨 우리 집 벨을 줄줄이 누른다.


씨알 농장은 집에서 차로 10분이면 간다. 주말엔 캠핑하는 사람이 가득해서 발 디딜 틈이 없지만 주중엔 조용하다. 남자아이 넷과 딸까지 다섯을 태운 차는 도떼기시장 저리 가라다. 수다스러운 남자애들의 왁자지껄함이 차를 가득 채웠다. 녀석의 들뜸에 일조를 한 나는 갑자기 괜찮은 엄마가 된 마냥 우쭐해진다. 조금만 집을 벗어나도 녀석들은 신바람이 난다. 게다가 친구와 함께니 마구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농장에 들어서면 왼편 산기슭에 비탈진 곳에서 널빤지 대신 상자를 깔고 미끄럼 탄다. 어릴 적 시골 구릉에서 비료 부대로 미끄럼틀 타던 풍경과 흡사하다. 남자아이 넷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뿜으며 논다. 우린 드넓은 숲을 하루 빌린 느낌이랄까. 귀가 먹먹할 정도로 웃고 소리 지르고 온몸으로 뒹군다. 아침에 읽은 “기게 하라, 구르게 하라, 적당히 긁히고 까지게 하라”는 오소희 글 그대로다. 자연 속에서 놀게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단박에 이해되는 순간이다.


딸내미도 오빠들 틈에서 상자 조각을 구해 구릉에서 제법 미끄럼을 잘 탄다.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려면 올라가야 하는데 언덕엔 밧줄도 달렸다. 녀석들은 언덕 올라가면서 밧줄 없이 살아남기 게임도 하는데 다시 구르기를 여러 번하며 자지러진다. 그렇게 놀다가 별일 아닌 일로 큰소리도 내고 다투기도 하지만 이내 사과할 줄도 알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노는 게 참말 놀랍다. 그동안 매일 혼자 놀러 나가는 아들 녀석이 친구와 어떻게 노는지 친구 관계는 어떤지 살펴볼 기회다. 남자애들은 역시나 험하게 놀긴 하더라.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는 그 어느 날보다 기세등등하다.


한 아이는 간식으로 거봉을 싸 왔는데 가방을 옆으로 멘 채 깔아뭉개며 미끄럼을 탔다. 한참을 놀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간식 봉지를 꺼냈는데 이미 주스다. 뒤늦게 간식을 기억해 낸 게 더 대단했다. 흐물흐물 생기 잃은 거봉 한 알을 먹으면서 아이들은 웃겨 죽는다. 씨앗을 뱉어내면서도 뭐가 좋은지 연신 깔깔댄다. 간식을 어쩜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냐고 면박을 준 게 오히려 미안할 정도로 모든 상황이 그저 즐겁다. 별거 아닌 일에 까르르 웃는 통에 나까지 덩달아 웃음이 터진다.


학원 스케줄 때문에 6시까지는 가야 한다던 친구는 무아지경에 빠져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친구 엄마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늦는다고 양해를 구하고서야 해가 질 무렵에 겨우 차에 태웠다. 온몸은 흙먼지로 뒤 덥히고 얼굴엔 시커먼 국물이 어찌나 흐르던지. 땀에 섞인 떼 국물을 직접 눈으로 보니 꼬질꼬질함이 가관이다. 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 지나기 전에 아이에게 꾀죄죄한 국물이 더 많이 흐르게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