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런던 그리고 도쿄
(더 이상 어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젊다면 젊다고 할 수 있는 나이 치고는 비교적 다양한 문화와 사회에서 살아보았다. 초등학교 때 아빠의 학업 때문에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나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때 느끼고 경험했던 것을 잊지 못해 중학교 때 유학을 갔고, 그 후로 대학교 졸업 후 취업까지 인생의 절반 가량을 미국에서 보냈다. 서류상의 나는 100% 한국인이지만 성장기 몇 년과 사춘기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나는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항상 정체성의 혼돈을 겪었다. 이것은 단지 언어뿐만이 아니라, 생활양식과 사고(思考)까지 나의 미국스러운 면모와 나의 한국스러운 면모가 섞여서 제3의 정체성을 만든 것이다. 장점이라면 미국인과 있을 땐 미국인스러워질 수 있고, 한국인과 있을 땐 나의 한국스러운 면이 나와서 카멜레온처럼 상황과 주변인에 나를 맞출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를 다르게 해석하면 미국과 한국 둘 중 어디에서도 완벽한 소속감을 못 느낀다고 볼 수 있다. 영어로는 나 같은 사람을 일컬어 third culture kid라고 한다.
예전에 1부터 10까지 중에, 1이 한국 유학생이고 10이 미국 교포라면 나는 어디쯤인 것 같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실제로의 나는 온전히 한국 유학생이지만). 나는 이 질문이 참 신선했었고, 이건 곧 유학생과 교포 사이의 어딘가 되는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내 생각에 나는 한 6 정도 되는 것 같다. 이러한 나의 배경은 내가 제3의 문화권에 갔을 때 조금 더 특별해졌다. 나는 한국인, 미국인 둘 다 아닌 제3의 관점으로 그 문화를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나를 한국인, 미국인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 되는 사람으로 대했다.
이 포스팅에서는 "세 도시의 엄마"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내가 성인이 되어 엄마로서 살게 된 서울과 런던과 도쿄를 역사적인 관점과 third culture kid인 나의 주관적인 관점과 경험을 보태어서 설명하겠다.
만 2년밖에 살지 못한 런던은 나에게 이루지 못한 첫사랑 내지는 전생에 나의 고향이었을 것만 같은 그런 애틋한 도시이다. 한국인으로서 미국에 살며 느끼지 못했던 소속감을 런던에서 받았고, 장소에 소울메이트가 있다면 나에게 그곳은 바로 런던일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런던에 사는 사람들이 다양성을 인지하고, 나 같은 global nomads가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제국화를 발판으로 세계화를 선두에서 지휘하여, 전 세계인이 영어를 쓰도록 한 영국이라는 나라의 수도로서 뭔가 snobby 하고 콧대 높을 것 같은 런던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세계적으로 상징적인 존재이고 그런 위치에 있기에 겉으로는 전통적인 “영국스러움”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국화의 영향으로, 역으로 많은 인종/국적의 사람들이 런던으로 몰려와, 현재는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진정한 메트로폴리스다. 따라서, 실제로 생활하면서는 영국이라는 큰 틀 안에서 다양한 민족과 정서가 서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는 매력적인 도시이다.
나와 나의 아이들이 태어난 서울. 미운 구석도 많고 예쁜 구석도 많은 서울은 나의 고향이다. 내가 살아본 세계의 그 어떤 곳 중에도 인프라로 치면 서울만 한 곳이 없다. 그만큼 기술이 빨리 발전하고 겉모습을 중요시하는 곳이다. 하지만 서울은 나의 아픈 곳이기도 하다. 내가 선진국에 살면서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열등감을 서울이 그대로 보여준다.
서울은 대한제국 이전에는 직간접적으로 중국의 영향권에 있었고, 그 후로 35년간은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광복 이후 바로 일어난 한국전쟁 때문에 산산조각이 났지만 지난 50년간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한 곳이다. 지리적인 이유로 중국문화와 흡사하지만, 일본의 지배로 일본을 닮은 점도 많고 - 한국전쟁 이후로 미국에 대한 동경으로 (싱가포르, 홍콩 등 서양의 직접 지배를 받은 나라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 전체에서 서양문물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이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객관적인 관점으로 보는 서울은 사실 참 특이한 도시다. 아픈 역사를 거쳐 여러 문화의 영향으로, 변화에 민감하고 신문물을 빠르게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승화하는 재주가 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는 말이 안 어울리는 곳 하나를 고르자면 도쿄일 것이다. 도쿄에 산지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양파같이 계속 새로운 면을 계속 발견하게 된다. 언어가 서툴러서라고 하기엔 그보다 더 큰 문화적 괴리감을 매일 느끼는데, 그건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타 지역과 굉장히 다른 점이 많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내가 아는 한국의 정서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아주 크게 빗나갔다.
동아시아의 제일가는 선진국인 일본의 수도인 도쿄는 사실 "시”가 아니라 "도"로 분류가 될 만큼 물리적인 면적이 크다. 도쿄도를 굳이 한국의 사정과 비교하자면 경기도 전체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큰 도시가 아주 질서 정연하고 반듯하게 유지된다는 건 그만큼 이 곳 사람들은 정해진 규칙을 유별나게 잘 지킨다는 것이다. 외국인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아주 사소한 모든 것에도 규칙을 정해놓고 그것을 예외 없이 지켜나간다.
일본은 세계대전 이전에 오랫동안 동쪽 끝의 섬나라였기 때문에 독특한 형식으로 발달한 문화와 규율이 존재한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는 최신 기술 등을 받아들임에 느리다. 하지만 규모가 큰 내수시장 덕분에 굳이 세계화를 하지 않아도 자급자족이 가능하기에 전통적인 문화와 규칙을 잘 보존하고 있다. 오히려 그 덕분에 특유의 개성을 살려 세계인의 관심대상이 되는 곳이다.
2년이 되어가니 겨우 적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도쿄는 아직도 나에게 너무나도 신기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