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내리며 알게 된 것
(260407)
원두를 구매하고 서비스로 받은 커피를 마시며 ‘앞으로는 좀 더 촘촘한 즐거움을 누려보겠다’고 결심한 지 3주가 흘렀다. (<13. 커피를 맛있게 마시다가>편 참고) 그 3주 사이에 우리집에는 타이머 기능이 포함된 전자저울과 얇고 가벼운 유리잔, 하리오의 드립퍼와 필터가 새로 생겼고, 그들은 기존의 핸드폰 타이머가, 무거운 머그컵이, 다이소 드립퍼와 생산된 지 몇 년은 흘렀을 오래 묵은 필터가 하던 역할을 완전히 대체했다.
하리오 드립퍼와 필터를 처음으로 짝 맞춰 써본 날 나는 감격했다. 필터를 접지 않아도 이렇게 쏙 들어간다니! 게다가 드립퍼만으로도 이렇게 예쁘다니! 전자저울과 유리잔과 드립퍼와 필터를 다 합쳐도 몇 만원밖에 되지 않는데, 이게 뭐라고 그간 그렇게 게으르게 미뤄온 것인지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집에 있던 전동 그라인더에도 처음으로 관심을 가져 핸드드립에 맞게 분쇄도를 조정해놓고 조금씩 굵기를 다르게 설정해보기도 하고, 뜸들이는 시간과 추출 시간을 일정하게 지켜가며 거의 매일 아침마다 테스트를 하다보니 커피의 향과 맛에 대한 기준치도 잡혔다. 로스팅 후 2~3주 정도가 지난 원두는 그 맛과 향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전에는 내가 내린 커피가 맛있게 잘 내려진 건지 아닌지, 원두 상태가 좋은 건지 아닌지 등을 구분할 수가 없었고 심지어 관심조차 없었는데, 이제는 커피에 물을 부을 때 더 가느다랗고 일정한 물줄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전기포트 자체가 핸드드립 하기에 좋은 형태라 아직은 드립포트와 온도계를 구매하지 않았다. 아직은.)
‘일할 때는 맛있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고 단언한 게(<11. 커피를 맛있게 마시는 방법>편 참고) 무색하게도, 처음 몇 모금만 커피 맛과 향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일을 하느라 제대로 즐기지 못하더라도, 그 처음 몇 모금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저울을 꺼내 원두의 무게를 재며 달그락소리를 듣고, 그라인더로 옮겨 버튼을 누른 채 한 알도 빠짐없이 모두 잘 갈렸는지 귀기울이고, 저울 위로 비커컵과 드립퍼와 필터를 잘 세팅하고, 원두 가루를 흘리지 않게 잘 부어주고, 뜨거운 물을 둥글게 부어가며 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풀어오르는 원두를 감상하고, 떨어지는 물줄기가 가지런하도록, 그러면서 정해진 시간과 물의 양을 넘기지 않도록 저울에 뜨는 숫자에도 신경을 쏟고, 추출이 끝난 뒤 투명한 비커에서, 입술에 둥글게 닿는 느낌이 나는 투명하고 가벼운 유리잔에 커피를 옮겨 담을 때의 주륵 하는 소리를 듣고, 무엇보다 그 모든 과정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원두의 향을 느끼는 시간, 그 시간들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치게 훌륭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