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사랑하며, 내려놓고, 받아들이며
사랑에 빠진다는 건 참으로 오묘한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 구두를 신고 베이글을 입에 물고 자판을 치며 상사에게 갈굼을 당하고 사람들 뒤에 조르륵 서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가는 그 길, 모든 순간이 한 사람으로 인해 뒤흔들리는 사건.
그건 삶의 궤적이 바뀌는 일이다. 삶의 귀적이란 한 사람이 그려온 삶에 대한 모든 태도와 방향, 그 깊이 모두를 말한다. 지구 인류 중 그 궤적이 같은 사람이 있을리가 만무하고 그 궤적이 쌓아온 시간만큼 그걸 바꾸기란 쉽지 않다.
나이테 같은 고유의 궤적을 외부의 힘으로 뒤흔드는건 애정이 거의 유일하다. 삶에 애정이 심기게 되면, 그 전의 궤적이 어땠는지 - 그 사람 만나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이 안나 - 알지 못할만큼 커다란 파동에 휩싸인다. 그건 애정의 크기만큼. 자신의 안에 그 사람을 자리하게 한 크기만큼.
어제의 없던 존재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되었다면, 내 안에서는 어떤 변화가 생겨날까. 그 사람이 내 안에 들어온만큼, 그 자리만큼 내 안의 것을 포기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그것이 시간이든, 관심이든, 돈이든, 자신의 취향이든.
그레이와 50가지 그림자 : 심연. 그레이는 전편에서 아나스타샤에게 홀딱 반했다. 그녀에 대한 애정을 깨닫게 된 것은 그녀가 빠져나간 자리, 그 자리의 크기를 실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텅 비어버린 자신의 삶. 그 크기만큼 아나스타샤을 좋아한 것이라고, 그레이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녀'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 크기를 받아들였을 때, 그레이는
자신의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다. 아나스타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큰만큼,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어떤 것. 포기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을 대신해야 했다. 그레이의 경우 독특한 성적 취향이었다.
사랑에 대한 가늠이 쉽지 않을 때, 때론 이 포기라는 행동이 그 크기를 잴 수 있는 가늠자가 되기도 한다. 아나스타샤는 그레이가 자신의 모든 취향을 버리는 대신 자신을 받아들여달라고 무릎을 꿇었을 때, 그가 얼마나 어려운 결심을 했는지 실감했다. 그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이다. 그만큼 사랑한다는 거다.
물론 결심하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큰 차이다. 결심이 행동을 담보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사람은 이전에 그려온 괘적들이 만드는 관성으로 인해 또 그렇게 살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다른 입력 부호를 넣어도 새로운 삶을 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많은 연인들이 이 부분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다.
서로의 합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그 전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나의 일상이 상대에게 문제가 되는 순간, 혼란이 찾아오고 이윽고 트러블로 발전한다. 합을 맞추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문제가 다시 그대로 드러날 때는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사람도 당황스럽고 허탈하다. 그레이도 마찬가지일터. 이전까지 자신의 성적 취향을 전혀 문제시 하지 않았고, 한 적도 없었으나 아나스타샤로 인해 그것이 '문제'로 바뀌었다. 우여곡절 끝에 문제로 여기고 아나스타샤를 받아들이는 대신 문제를 포기했지만, 앞으로 그 문제가 다시 둘 사이에 부상할 것은 불보듯 뻔하다.
모든 연인도 그렇다. 이처럼 어려운 포기의 순간에 당도한다. 결국 연애는 끊임없는 '나'와 '우리'의 대결이고 갈등이다. 연인이라는 관계는 계속해서 물음을 던지게 한다. 이제까지의 나를 고수할 것인가, 그 사람을 만난 뒤의 새로운 내가 될 것인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내가 그려온 괘적과 그 사람의 공간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순간.
영화의 마지막, 그레이는 자신 대신 그 사람의 공간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는 안다. 자신도 변하지 않고 관계도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세상 가장 완벽한 커플도 맞지 않는 조각이 있기 마련이다. 혹 완벽해 보이는 커플을 발견했다면 그들은 끝없이 자신을 깎아 상대에게 자신을 맞춘 경우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랑의 첫 오묘한 순간처럼, 내 안의 어떤 파동이 영원했다면 사랑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진짜 모습은 그 파동 이후의 인내와 배려와 자기포기로 일궈진다. 사람이 이기적인 존재로 태어난만큼 사람에게 참 어울리지 않고 어려운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란 단어와 정말 어울리지 않는 그레이는 앞으로 아나스타샤와 진짜 사랑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우리는 할 수 있을까. 내 안의 많은 것을 내려놓는 대신 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이 커지는 사랑의 법칙. 어찌보면 살아있음 평생의 이유가 이 법칙을 이해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을 듯 하다. 살아가며, 사랑하며. 내려놓고 받아들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