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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수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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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Jan 22. 2024

어린아이처럼 믿기

주님 앞에서 

주님의 가르침 중에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신앙적으로 모순된다.

현실과 사실이 다른데 우리에게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말씀은 무섭기까지 하다.


그중에 하나가 [어린아이] 비유이다.


[눅18:15-17, 새 번역]
15 사람들이 아기들까지 예수께로 데려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다. 제자들이 보고서, 그들을 꾸짖었다.16 그러자 예수께서 아기들을 가까이에 부르시고,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의 것이다.17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자.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자기 아이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와서 기도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제자들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우리 선생님, 예수님은 메시아인데 … 감히]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귀신에 들린 사람들은 감히 예수님 앞에 나서지 못했고, 병자들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주님 앞에 나아갔다.

그런데 매너 없고 주책맞은 부모(엄마일까? 아빠일까?)들이 자기 아들을 데리고 나와서 ‘불쑥’ 기도를 부탁했다. 


제자들은 짜증이 났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데 예수님 반응이 제자들에게 더 황당하고 당황하게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대해 내 마음도 제자들처럼 답답한 이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자녀를 내가 사랑하지만, 나는 이들의 어린 행동을 기억하고 있다.

나의 자녀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대부분 이기적이고, 떼쓰고, 싸우고, 자기 것만 챙기고, 고자질하는 아이다.

강아지 새끼처럼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기고 자기 것만 챙긴다.

내 눈에는 그런 모습이 귀엽고 참을 수 있지만, 천국에 있는 사람이 모두 이렇다면 … 너무 끔찍하다.

공공장소에서 내 자녀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다른 아이의 울음은 자동차 경적처럼 들린다. 천국이 이런 난장판일까?

도대체 예수님께서 말한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취향이 독특하신 것일까?

내가 보는 어린아이와 주님이 보시는 어린아이는 분명 다른 것 같다.


나의 자녀들이 말썽꾸러기이지만 내 목숨보다 귀하다. 

내 자녀가 나의 소중한 존재인 이유는 내가 그들의 아빠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 당연함이 진리다. 

하나님이 나의 아빠이기 때문에 나는 주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았다.

8살 딸과 6살 아들은 나 없이는 한 달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내가 100% 전적으로 보호하고 돌보는 존재이다. 그런 자녀는 오직 나만 의지하고 바라본다.

어린 자녀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려고 하지 않고 아빠만을 의지한다.



천국에 있는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신앙이란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존재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어린아이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존재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살라고 하셨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포도나무 가지처럼, 목자 옆에 있는 양처럼, 주님 안에 그리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존재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붙어있는 존재처럼 살라고 하셨다.

사람, 돈, 명예, 힘에 의지하지 않고 말씀으로 살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하나님만 섬기라고 했다.

우리에게 아이와 부모의 관계를 요구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어린아이가 되는 방법은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다.


[시 131:1-3, 새 번역]

1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2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 뗀 아이와 같습니다.

3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주님만 바라본다.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 어린아이 기독교인이 되는 안티 에이징(노화방지)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를 머리카락 한 가닥도 희게 하지 못하고, 자기 생명도 1초도 연장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기 일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창조주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을 말한다.


[사 46:3-4, 새 번역]

3 "야곱의 집안아, 이스라엘 집안의 모든 남은 자들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희를 안고 다녔고, 너희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너희를 품고 다녔다.

4 너희가 늙을 때까지 내가 너희를 안고 다니고, 너희가 백발이 될 때까지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다. 내가 너희를 지었으니,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고, 안고 다니겠고, 또 구원하여 주겠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분이다. 나의 하나님 아버지가 이런 분이라면 나는 그분의 아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나를 금쪽이처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이런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우하신다.

하나님은 극성맞은 부모의 치맛바람처럼 나를 기르시지 않는다.

성령의 바람으로 소리는 듣게 하지만 어떻게 나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며 지켜주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증보했다.

[엡1:19, 새 번역]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나는 내 아버지 안에서 영원히 어린애처럼 살고 싶다.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과 하나가 되는 그런 어린아이 같은 존재로 살고 싶다.


그런데 …. 어린아이 이벤트 이후에 반전의 사건이 일어난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누가 보아도 천국에 갈만한 신실한 청년이 주님 앞에 나온다.

(나의 상상) 방금 전에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를 야단쳤던 제자들은 부자처럼 보이는 말쑥한 청년이 예수님에게 가도록 길을 터주었을 것 같다.



[눅18:18-24, 새 번역]

18 어떤 지도자가 예수께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1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20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21 그가 말하였다. "나는 이런 모든 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3 이 말씀을 듣고서, 그는 몹시 근심하였다. 그가 큰 부자이기 때문이었다.

24 예수께서는 그가 [근심에 사로잡힌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재물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예수님은 조금 전에는 말썽꾸러기 같은 어린아이들을 안아주시고 기도하면서 이런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이 천국에 간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보아도 천국에 갈 사람인데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셨다.

부자 청년 자신도 그렇게 말했지만 누가 보아도 부자 청년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킨 사람이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의 부모는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었다. 

하나님은 일종의 엄마 같은 유모, 아빠 같은 삼촌이다.


예수님에게 기도받기 위해서 나온 어린아이.

어린아이 시절부터 계명을 지킨 부자 청년.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구하지 않았다. 예수님에게 구원에 관해서 물어보려고 왔다. 

부자 청년은 자기 눈앞에 구원자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보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에게 한 수 배우고 싶었기에, 내가 구원받기 위해 조금 남은 그 무엇을 자기의 의와 돈으로 해결하기 위해 주님 앞에 나왔다.

구원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무엇을 했는가를 믿어야 받는 것이다.


시편 131편 말씀처럼

자신이 욕망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천국에 사는 어린아이처럼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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