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사가 되어 베란다를 가꾸다
'온갖 위험과 불안에서 벗어나 쉬고 싶을 때 나는 집이 아니라 정원에 간다. 그곳에 가면 자연의 너른 품 안에서 보호받는 듯 편안한 느낌이 들고, 온갖 풀과 꽃이 친구가 되어준다.' - 엘리자베스 폰 아님, 1898년
집 안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답답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재택근무로 출근도 하지 않고 사회적 거리 두기로 모임도 사라지면서 단조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컴퓨터 화면만을 응시하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TV 앞에 앉아 멍하니 리모콘을 쥐고 있는 것뿐이었다.
▲ 겹벚꽃 산책길에서 만난 겹벚꽃 ⓒ 정무훈
가끔 아파트 베란다를 통해 창밖을 바라보면 어느덧 나뭇잎이 초록에서 진녹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베란다에 나가면서 그동안 거들떠 보지 않았던 집 안에 화분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새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큰마음 먹고 양재 꽃시장에서 3년 전에 구입한 치자나무와 대나무 야자, 수국, 구아바 나무가 아직 살아 있었다. 가끔 죽지 않을 정도로 물을 주고 몇 해 동안 분갈이 한 번 제대로 해 주지 않은 나무들이었다. 핑계지만 일상이 지치고 힘드니 나무에 관심을 주지 못했고 차츰 나무를 키우는 것이 귀찮았다.
그러나 나무에게도 구원의 손길이 닿은 것은 작년의 일이다. 아이들의 돌봄을 위해 장모님이 집에 오시면서 나무들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장모님이 분갈이해 주시고 퇴비와 새로운 흙을 두둑하게 화분에 넣으셨다. 아침마다 블라인드를 활짝 열고 나무들이 햇살을 받게 하고 창문을 열어 신선한 바람을 온종일 쐬게 해 주셨다.
나무들은 돌보는 손길이 닿으면서 잎새가 반질반질 윤기가 돌기 시작했고 새순이 올라왔다. 그러더니 급기야 올봄에는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온 첫 해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꽃을 피우지 못했던 나무들이 드디어 생명의 기운을 되찾았다.
내가 재택근무를 시작하게 되면서 장모님은 나에게 어린아기를 맡기듯 화분 관리를 당부하셨다. 물은 이틀에 한 번 꼭 주고 환기도 자주 시켜 주라고 하셨다. 그리고 해충이 생기지 않도록 꽃봉오리와 나뭇잎을 유심히 살펴보라고 하셨다.
재택근무를 시작한 다음 날부터 나는 화단을 관리하는 정원사가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식물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사실 집에 있으면 모니터를 계속 보고 있어서 눈이 시리고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휴식을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베란다에 가서 나무와 화초를 돌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신기하게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식물들의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하루가 다르게 새순이 올라오고 꽃봉오리가 자라는 나무가 기특하고 신기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베란다 창문을 열고 화초에 물을 주는 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무튼, 식물>이라는 책에서 임이랑 작가는 식물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매일 기다려지는 것들이 있기에 아침에 일어나마자 옷을 대충 챙겨 입은 채로 테라스에 나가 식물들을 한참을 앉아 구경하는 삶이 지금의 나를 충족시키는 삶이다. 온 세상을 통틀어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내 식물들의 미묘한 표정을 놓치지 않고 목격하고 싶다. 이런 욕심은 결국 삶에 대한 욕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건강한 욕심을 주는 에너지가 고맙다.'
- 143쪽, 아무튼 식물, 코 난북스, 임이랑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아파트 화단도 다양한 나무와 꽃들이 어우러져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점심을 먹고 아파트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부드러운 햇살을 느끼고 싱그러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기분 좋은 감촉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주말이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억지로 막히는 길을 따라 교외로 나갔었다. 사람으로 붐비는 음식점을 휴게소처럼 거쳐서 다시 힘들게 집에 돌아오면 더 지치고 허무한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큰 나무 밑 놀이터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것만으로 편안했다. 재택근무가 끝나고 다시 출근하면서 지하철 앞 꽃집을 이제는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모종과 눈부시게 빛나는 꽃을 한참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 충동적으로 보라색 라벤더와 분홍 미니 장미와 프리지어 화분을 두 손 무겁게 들고 베란다에 옮겨 놓았다.
새로 들여온 화분을 다른 나무들과 나란히 배치하고 시원한 물을 뿌려 주었다. 라벤더 향이 가득하고 미니 장미가 싱싱하게 빛나고 프리지어의 노란색이 햇살에 눈부시게 빛날 때 베란다는 비밀 정원이 되었다. 이렇게 작은 식물들이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이 될 줄 몰랐다. 그다음 날 퇴근길에 꽃집에 들러 직장에서 키울 소사나무와 주방의 창가에 두고 볼 선인장을 샀다.
▲ 게발 선인장 꽃가게에서 만난 식물 ⓒ 정무훈
이제 아파트 단지 안에 피어 있는 꽃들과 출퇴근길에서 보는 다양한 식물에 관심이 간다. 울타리 담장 너머로 핀 붉은 장미가 아름다워 한참 동안 서 있게 된다. 식물을 기르는 일은 나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작은 기쁨과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식물을 잘 키워 씨앗을, 묘목을, 모종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식물을 가꾸는 일은 삶을 가꾸는 일과 비슷하다. 하루하루 공을 들이며 더딘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 라벤더, 프리지어, 미니 장미 퇴근길 화원에서 들인 식물 ⓒ 정무훈
베란다 정원을 가꾸게 되면서 식물과 정원에 관련된 책을 읽고 유기농 비료와 토양을 알아보고 인터넷에서 식물을 키우는 법을 찾아보며 나는 코로나로 인해 잃어버린 생기와 기쁨을 되찾게 되었다.
올해는 치자꽃 봉우리가 여섯 개나 올라왔다. 곧 집 안 가득히 알싸하고 황홀한 치자꽃향이 가득할 것이다. 구아바는 입안에서 상큼하게 톡 터지는 새콤한 열매를 맺을 것이고 수국은 신부의 손에 든 꽃다발 같은 붉은 꽃망울을 터트릴 것이다. 그래서 내일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나만의 베란다 비밀정원 가꾸기는 계속될 것이다.
▲ 소사나무 사무실에 둔 소사나무 ⓒ 정무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