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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전씨 Jan 10. 2019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라는 Bullsh*t

  저는 일하면서 “여자라서 이런 거는 잘 모르겠지”라는 말을 심심지 않게 듣습니다. 저와 비슷한 연차의 다른 여자 동료는 술자리에서 처음 만나는 동료에게 “아가씨” 소리까지 들어야했습니다. 놀랍게도 저는 모두가 말하는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입사하던 날부터 그 얘기를 주구장창 들었습니다. 대외적으로 여성이 일하기 좋은 기업으로 어디서든 손 꼽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왜 여자가 다니기 좋다고들 하느냐, 그들이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출산휴가, 육아휴직이 자유롭다. 둘째 여성 리더를 적극 양성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정말 이 두 가지 이유로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라고 할 수 있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말이죠. 여자가 일하기 좋다는 게 대관절 무슨 의미일까요?


  남자인 제 매니저에게 술자리에서 이런 고충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라고 얘기할 뿐이었죠. 그 이야기의 근거는 다른 회사들에 비해서 여자들이 일하기 좋은 건 사실이 아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차서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죠. 저는 그 매니저의 이야기가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의 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단적인 모습을 조금 더 상세히 파헤치고,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란 어떤 곳인가 저의 언어로 정의해보고자 합니다. 과연 여자가 일하기 좋다는 것은 무엇일까, 읽으시는 분들께서도 그 의미를 여러분들도 가볍게, 그렇지만 전격적으로 재구성해보시기를 요청드립니다.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라는 Bullshit

  제도를 세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상황이 최악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며, 그것을 따름으로써 사회가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가 자동으로 실현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제가 아래에서 묘사하는 제도들을 갖추지 못한 회사들도 있고, 그에 비해 제가 더 좋은 상황에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기가 정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요? 다음은 위에서 살짝 언급한,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 하는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의 조건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출퇴근도 자유롭고,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이 자유로우니까 여자가 다니기 좋은 회사 아니야?

  이 말은 곧 출산과 육아는 곧 여성의 역할임을 규정하는 말입니다. 출산과 육아휴직을 쓸 수 있어서 남자에게 좋은 회사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있나요?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남자가 가정에서의 노동을 ‘도와준다’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의 말인 겁니다. 백 번 양보해서 이 말이 참이라고 넘어간다면, 비혼을 선택한 여성들은요? 그들에게도 이 회사가 다니기 좋은 회사인가요? 그냥 ‘편하고 자유로운 회사야’라고 했으면 잘 넘어갔을 문제를, 굳이 ‘여자가’ 다니기 좋다고 하는 그 태도와 정신의 바탕이 문제가 된다는 것 정도만 짚고 싶네요.


  여성 리더를 얼마나 키우냐가 매니저의 KPI인데, 이 정도면 남자들한테 역차별급 아니야?

  이 말은 얼핏 들었을 때 굉장히 설득력 있는 말입니다. 실제로 저희 회사에서는 같은 수준의 퍼포먼스면 여자가 먼저 승진합니다. “당신 올해 여성을 몇 명이나 승진시켰어?”라는 식의 KPI가 있으니까요. Women Council 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여성들이 다니기 더 좋은 회사가 되기 위한 활동들을 기획하는 여성들의 리더십 모임인데요, 아무나 가입할 수는 없습니다. 부서에서 촉망 받는 여성 리더들만 가입하게 되고, 사실상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출세길 열렸다고 할 정도로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합니다—저도 해보지 않아서 모르고 소문만 들었습니다. 이정도면 회사가 작정하고 여자들을 밀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하는 현장에서는 과연 어떨까요? 면전에서는 “역차별이야~”라며 농담을 하고, 뒤로는 “여자라서” 빨리 승진했다고 비아냥대고, 주니어들에게는 “너도 여자니까 열심히 해”라는 조롱인지 격려인지 모를 말들이 흘러들어가죠. 승진한 여성들의 권력에 대한 챌린지 역시 존재합니다. 제가 이전에 속해있던 팀은 오랫동안 한 남자 팀장이 담당해왔습니다. 그러다 여자 팀장으로 교체가 되었습니다. 때는 그녀가 팀장이자 매니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채 맞은 팀 송년회 자리였습니다. 그녀는 매니저가 되고 나서 보낸 시간의 소회를 나누면서, 팀원들에게도 올 한 해 어땠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자 부장이 저 편에서 “뭐 그런 걸 합니까?” 하면서 그녀를 완전히 무시하고 건배를 하더군요. 그는 참고로 남자 팀장의 말은 당연히 잘 듣는 사람이었습니다ㅎㅎ. 회사에서 승진을 시켜주면 뭐하나요? 타당한 이유 없이 구성원들이 깎아 내리지 못해 안달인데요.


  위 단편적인 사례를 통해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제도가 기계적으로 보장한다고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실은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라는 말 자체가 돌아다니는 순간부터 그 회사는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내가 능력을 보여주고 성과를 창출해서 회사와 개인의 성장을 견인해야 하는 현장에서, 특정 성별에게 좋은 회사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그 특정 성별을 ‘일반’ 내지 ‘보편’의 범주에서 격리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정말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가 되기 위해서

  그렇다면 정말로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할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여성의 절대적인 수가 더 많아져야 한다

  더 넓은 풀에서 더 많은 여자들이 각자의 생애주기를 거치면서도 전문인으로서 계속 발전하는 생태계를 만들어주는 회사가 여성이 일하기 좋은 회사입니다. 제가 이전 <IT에는 문과 여자가 절실하다>에서 말한 것처럼 더 많은 여성이 사회적 영역에 존재해야 합니다.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이기 위해서는 일단 여자가 정량적으로 많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전적으로 회사에서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어야 하는 부분이고, 마음 먹으면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일견 당연해보이는 여성의 정량적 증가를 주장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 포함 제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자신보다 2-3년 앞에서 가고 있는 같은 처지의 다른 여성들이 없다는 겁니다. 여성 임원은 조금씩 생겨나는 걸 보니까 뭔가 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지금 당장 눈 앞의 이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 건지는 막막한 거죠. 주변에서는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데 그런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즉 Peer 롤모델 풀이 없는 겁니다. 이런 어려움이 출산과 육아를 겪으면서 심화되어 여성들의 커리어 이탈이 발생하고 풀은 더 줄어들죠.


  여자를 많이 뽑는다 해도 그들이 '버틸'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라면, 가정과 출산으로 인한 생애주기적 변화를 지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장 내 ‘전문인’의 관점에서 우선하여 접근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경험하게 되는 전문인으로서의 라이프사이클을 상정하고, 이에 따른 리더십 교육이나 네트워킹, 멘토링, 외부 강좌 등을 제공해야 합니다. 일—가정 양립에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의 그 '일'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자’로서 소환되지 않아야 한다

  IBM의 CEO인 지니 로메티는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관심 없다, 당신이 우리 조직에 있을 능력이 증명되었다면”이라고 말했습니다. IBM은 특히 diversity를 회사의 핵심 가치로 내세우고 있었고 이를 활용한 회사 이미지 브랜딩을 해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니의 이야기는 이제 이 회사가 Diversity가 아니라—즉 개인의 속성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그 조직이 Inclusive 한 지를 보는 것으로 내러티브를 바꾼 것을 의미합니다. 사회적 소수자를 가장 먼저 비즈니스 영역에서 포용하기 시작한 IBM. 이 새로운 시도가 의미하는 것은 개인을 그의 인구통계학적 성질로 호출하는 것 자체를 지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암호화폐 거래소의 전략기획을 맡고 있는 정하얀(가명) 실장은 최근 해외 프로젝트와의 회의 도중 아찔한 경험을 했다. 업무의 특성상 해외 프로젝트 팀과의 화상채팅이 자주 있는데, 어느날 문득 화면을 보니 수십 명 중 본인 혼자만 여자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발언할 때마다 이목이 쏠리고, 말에 대표성이 얹어지는 듯해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고. “저는 그냥 저로서 일하는데 갑자기 일터에서 여성으로 소환당하는 거랄까요. 아무래도 위축되기 쉬워요.”
—“여자라서 이해하기 힘들거야”…‘블록체인 언니들’ 리얼 생존기, 2018.12.10 블록체인프레스


  그 말인 즉슨, 내가 여자이든 남자이든 LGBTQ 이든 애초에 직장 내에서는 그 존재로 불리워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Hostile Work Environment 의 개념적 범위가 우선적으로 재정의되어야 합니다. 성희롱 교육에서 다루는 Hostile Work Environment 는 그 맥락 뿐 아니라, 소수자의 ‘업무’의 질 관점에서도 확장되어야 합니다. 아래 기사의 발췌 내용은 일하는 환경에서 맥락 없이 ‘여성’으로서 호출되는 경험에 대한 것입니다. 저 역시 회사 내에서 제 개인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과 관계 없이 불쑥 내가 ‘여성’ 대표로서 홀로 서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여성이 소수인 IT 업계에서는 더더욱 저와 같은 경험을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소위 말하는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이려면, 동료를 여자라고 일단 인식하지 않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제가 회사에서 만약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이런 회사가 어디 있겠느냐', '바라는 게 너무 많다'는 볼멘 소리를 들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모습을 꿈꾸지 않는다면 현재에 멈춰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여자가 일하기 좋은 회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다시 생각하고, 여기에 상상력을 더하는 시도가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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