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이가 IT에서 살아남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들
내 커리어는 전환의 연속이었다. 전혀 관련 없는 전공이고 관련 활동도 전혀 해본 적 없는데 IT 회사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회사에서 두 번 커리어를 바꾸었고, 세 번째 직무를 수행하면서 두 번째 회사로 이직했다. 지금은 두 번째 회사에서, 기존과는 또 전혀 다른 네 번째 직무를 시작했다. 인생에 처음 하는 거 해보려고 하니 매 순간 눈물 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문득문득 도대체 내가 어쩌다 이걸 하고 있지? 어떻게 이걸 하고 있지? 이런 생각에 혼자 또 절반은 혼란스럽다가 절반은 자랑스럽기도 하고 했다. 그와 더불어 "나 다른 엔지니어들과 비교해봤을 때, 쉬는 시간에도 코딩 공부를 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데?"라든지 "다른 사람들은 문제를 엄청 깊이 파고 끝장을 보는 타입인데 나는 아닌 것 같아"라는 의문을 많이 가졌다. 달리 말하자면, 내가 정말 이 직무에 맞는 사람인지, 앞으로 잘할 수 있을지 계속해서 의심했다.
계속되는 변화의 순간 앞에 서서 스스로의 의구심에 계속하여 답하다 보니, 모든 전환의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사회과학도로서 쌓아왔던 삶의 태도가 1) 경쟁력이 2) 계속 나아가는 힘이 되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개발을 정말 너무 좋아해서 눈만 뜨면 뭐든 개발하는 사람들에 비해 guru 가 될 확률은 낮겠지만. a.k.a. 문과생의 마인드셋으로도 적어도 재미있게는 일하고 있으니, 부끄럽지만 용기 내어 이 글을 쓴다. 내가 나의 커리어 전환을 반추해보며 그리고 IT업계에서 활약하는 다른 많은 문과생들을 보며, 이런 점이 있다면 겁낼 것이 없는데?"라고 느꼈던 것들을 정리했다. 혹시라도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계신 분들께서 이 글을 보시고 조금이라도 용기를 얻으시길 바란다. 이 외에도 힘이 되어주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반대로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다른 분들의 의견도 많이 듣고 싶다. 여력이 되신다면 댓글로 의견을 남겨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전환의 연속, 정치학도의 IT 생존기
영어는 잘잘익선이다. 신기술의 공식 문서, 질문과 답변 내용, 기술 블로그 등등은 거의 모두 영어다. 한글로 굉장히 양질의 콘텐츠를 업로드하시는 분들도 굉장히 많으나, 한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찾아보려면 영어 독해는 피할 수 없다. 스피킹도 마찬가지이지만 필수는 아니라 하더라도, 리딩은 정말 잘해야 한다. 개발하면서 공식 문서의 가이드를 읽다 보면, 한치의 해석을 잘못하여 삽질하는 경우가 꽤 생긴다. 언제나 그렇지만, 여기는 특히 '아' 다르고 '어' 다른 경우가 정말 많다.
입사하고자 하는 회사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처럼 외국계 IT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은 영어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기회의 폭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나는 엔지니어가 아니던 신입사원 시절에,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당시 굉장히 각광받던 분석 솔루션의 TFT에 들어가서 부사장과 미팅하는 등의 귀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 영어를 못한다고 큰일이 났다거나, 당신은 IT를 할 수 없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비전공자로서의 짐에 더해 영어의 짐까지 더 지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을 것이라는 정도로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리고 이건 이제 정말 진부한 말이 되어 버렸다. IT는 더더욱 그렇다. 소위 말하는 개발자 대우가 좋은 회사의 채용 공고를 보면, 거의 항상 "새로운 기술과 환경을 즐기며..."라는 말이 항상 들어가 있다. 실제로 그런지 궁금하다면 원티드에서 공고 몇 개를 눌러보면 된다. 이처럼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IT 업계의 숙명이고,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모든 직무 제1의 적성이다. 무언가를 새로이 접하고, 배우고, 그것을 잘하게 되는 '배움'의 라이프사이클 자체에 자신이 있다면 겁낼 필요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것을 빠르게 배우는, 이 추상적이어서 도무지 전혀 모르겠는 이 능력은 무엇을 뜻하나? 나의 경우에는, 받아들이는 정보를 조직화하여 나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일이었다. 이건 정치외교학 전공에서 배웠다. 정치외교학 전공은 보통, 이론의 1) 탄생 배경과 2) 실제 논증 내용 3) 의의 4) 한계 5) 이후의 논의의 흐름으로 이론을 학습한다. 그 뒤에 그 이론에 입각하여 실제 현상을 분석한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개념을 공부한 뒤, 중국과 러시아의 공산주의는 이 이론의 관점에서 어떻게 분석할 수 있는가 이런 것. 이 배움의 일련의 과정, 어느 순간에 어느 근육을 움직이는지 예리하게 인식하며 그 과정을 해내며 배움의 능력 자체를 길렀다. 이 능력은 업무 현장에서 빛을 발했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실무에 적용해보고 이로부터 다시 또 배우는 일이 빠르게 연쇄하여 일어났고, 내가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 앞으로 갈 수 있었다.
+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면 생활코딩 웹 과정을 정주행 해보시기를 일단 권해드린다. "오 좀 재미있는데?" 내지 "할 만한데?"라고 생각이 드신다면 그 뒤엔 codecademy에서 웹 과정이나 파이썬 과정을 해보시는 것이 좋다. 이 과정까지 지나신다면, 인프런에서 어떤 것을 배워볼 수 있는지 즐거운 쇼핑을 한 번 해보시고 한 분야의 두 가지 정도의 강좌를 들어보시면서 심화한다.
내가 정치외교 전공을 배우면서 단연 가장 많이 했던 것은, 분석의 층위를 오고 가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한 현상을 분석할 때 아주 대략적으로 1) 한 개인의 인격적 관점 2) 지역 사회의 관점 3) 국가의 관점 4) 국제사회적 관점 (미국 포함 동아시아..)을 자유롭게 넘나들 것을 요구받았다. 요컨대 나는 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마다 이 문제의 이해관계자들을 나례비한 뒤 게임 판을 그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이때 전공 공부를 하면서 배웠던 이런 것들이 생각 외로 나에게 큰 강점이 되어주었다. 개발을 할 때에도 인프라를 만질 때에도 언제나 큰 그림을 머릿속에 갖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술적으로 강점이 되기 위해서는 리드 타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IT에서의 문제를 해결할 때에 (장애가 아니라 개발 과제 등등) 어떤 것들이 이해관계자로서 등장하는지 알게 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이 꽤 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3 Tier 구조에서 웹 로딩이 안 되는 경우라면 어디에 뭐가 어떻게 작용이 될 수 있는지 그 요소요소를 소환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직적으로는 거의 바로 그 효용을 발휘한다. 엔지니어로서 협업을 해야 하는 때가 생긴다든지, 팀의 문제를 보아야 하는 때가 생긴다든지. 소프트 스킬이 필요한 곳에서는 관점의 스케일 조정이 언제나 동반되어야 한다. PM이라든지 관리 업무를 하게 된다면 이것이 이무기급의 힘을 줄 것이다.
이건 내가 사회과학도로서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 가장 마지막 순서로 두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서버를 배우고 개발을 배우는 과정에서 나를 가장 많이 가로막았던 것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내 앞에 산적한 과제들을 보면 정말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맞나,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데 라는 생각이 늘 나를 덮쳐온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아주 작은 성취이다. 합리적 이어 보이는 나의 의심을 귀납적으로 반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해봐야 한다.
그래서 일단 무턱대고 무엇을 만들든 뭐든 해봐야 한다. 회사에서 도저히 내 능력으로 해낼 수 없는 것을 한 번 해보겠느냐고 물어보아도 오케이하고 한 번 가봐야 한다. A, B, C, D, E를 해야 할 때 혹은 A, B는 알겠는데 그 뒤에 뭐가 올 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힐 때, 일단 A를 해보는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작년 Re:work Conference 제현주 대표 강의 후기 참조)
https://www.huffingtonpost.kr/2014/08/13/story_n_5673792.html
그렇다면 나를 그냥 일단 한 번 해보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필즈상 수상자 마리암 미르자카니 교수의 인터뷰를 보고, 내게 필요한 답을 찾았다. 그는 "수학을 하면서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내가 재능 있다'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개인 안에 내재된 창조성을 발현해줄 자신감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말한다. "내가 하면 될 거야. 왠지는 몰라"라는 뻔뻔한 태도가 필요하다. 시도해보면 일단은 성공할 수도 있으니까!
사실 어디 가서 대학 전공 얘기할 일이 별로 없다. 대학 시절에 배운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비전공자가 개발자가 되고 시스템 엔지니어가 되고 클라우드 아키텍트가 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다. 지금 내 주변만 둘러봐도 같은 팀에 중문과, 철학과 출신 분들이 평생 IT만 한 것처럼 일하고 있다. 일하다가 "저 사실 문과생이에요"라고 말하면서 은근하게 나 자신에 대해 변명하거나 상대방이 칭찬 한 마디 해주었으면 하는 때도 종종 있는데, 그럴 때면 "저도예요"라는 머쓱한 답변을 꽤 많이 들으니 뭐. 나 지금까지 잘 살아남았고, 기특하다! 앞으로 더 많은 분들과 연대하며 더 멀리 더 좋은 방향으로 계속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