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같은 주니어 레벨 사원 중, 인공지능 서비스 개발 사업부 쪽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멀리서 보고 그냥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저와 같은 대학 같은 학번의 경영학도였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식사라도 한 번 같이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기회가 드디어 생겼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20년차 (나름)장인들에게서도 별로 받지 못했던 위로와 영감을 한꺼번에 받아서, 헤어질 때 즈음에는 약간 현기증이 일 정도였습니다. 그녀와 통렬하게 공감하며 열띤 토론을 했던 주제는, 프로그래밍은 '생각하는 방식'이고 소위 말하는 개발 능력 같은 건 '기술'이기 때문에 연마하면 누구든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IT 만큼 문과생들이, 그리고 여자들이 많이 필요한 분야가 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그녀의 곁에 더 많은 여성이 함께 걷기를 바라며 이 글을 시작합니다.
인공지능, 블록체인, IoT 등등 IT 산업의 파괴력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하신 분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IT는 그 어느 때보다 이 사회의 미래를 제시하는 산업으로서 선두에 서 있죠. 더 빠른 속도로, 더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말입니다. 아마존, 페이스북, 구글 등은 드론 배달, 자동 주문, 무인주행, 이미지 인식과 같이 우리의 하루하루를 새롭게 하는 기술들을 빠른 속도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미래에 과연 여성이 포함되어 있는가? 저는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AI가 여자 음성은 간호사로 인식하고 남자는 의사로 인식하는 정말 일차원적인 문제—성별에 기반한 직업군을 자의적으로 정의하고,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한정시키는 문제—는 기본이고, 더 심오한 문제도 많습니다. 아마존에서는 2014년부터 인공지능을 활용한 채용 시스템을 개발하다가, 여성 차별 문제가 불거져서 이 시스템을 폐기한 바 있습니다. 기사에서는 "리쿠르팅 AI가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기술적으로 달리 말하자면 "여성이 배제되는 것을 막는 로직을 그 누구도 짜지 않았다"고 할 수 있죠. 인공지능도 사람이 한 땀 한 땀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그래서 아마존에서 폐기시켰으니 된 것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제도적으로 보완한다 해도, IT 전문가들이 이끄는 기술 자체가 소수자를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죠.
과연 이게 끝일까요? 기술이 선도하는 사회에서 여성이 배제되는 사례들을, 제도적인 장치로 정말 막을 수 있을까요?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걸 막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여성 엔지니어들이 필드에 나오고,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 개발 과정 '안에서' 뛰는 여성주의적 엔지니어들이 있어야 합니다. IT가 바꿀 미래에 여성의 생각을 더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이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들고 들어올 문과 백그라운드의 엔지니어들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IT 업계에 '문과' '여자' 엔지니어가 절실한 이유입니다.
지금 IT에 여성이 별로 없는 이유는 그들이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컴퓨터' '공학'은 늘 남자의 것으로 여겨져왔죠. 컴퓨터 고치는 것도, 필요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도, 사실은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 일 자체가 여성 앞에 온 적이 없었던 겁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런데, 전공으로 선택하기는 더 어려웠죠. 소위 "여자들은 수학과 공학에 약해"라는 말을 들으면서 사회화되었고, 왠지 언어와 사탐을 더 잘하는 것 같으니까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때 문과로 진입하고 IT와는 전혀 접점 없는 삶을 살아가죠. 사회화 과정에서 진입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어지고 그 안에서 무언가 성취할 공간이 보장되지 않으니, 많은 여성들에게 IT 및 공학 분야는 그냥 관심 없는 분야 그 이상으로 '내가 범접하지 못할' 영역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사회화 경험이 IT 전문인으로서의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주느냐.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랬습니다. 일단 IT 직무를 시작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대단한' 일인 걸로 보입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앞으로는 멋쩍게 웃으면서도 저는 속으로 두려웠습니다. 얼떨결에 시작한 일인데, 정말 제가 못할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리고 정말로 못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그러면 극도의 예민 상태에 빠지게 돼요. "내가 해서 될 일이 아닌데 시작해버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했으면 훨씬 더 잘했을 텐데 내가 해서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 "용기 있게 해보겠다고는 했는데 나 정말 재능이 없나 보다", 뭐 이런 종류의 생각이 굉장히 빠르게 반복해서 지나갑니다. 그러면 정말로 열정과 사기와 효율과 정확성이 한꺼번에 떨어져요. 될 일도 안되는 거죠. 누구나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면 겪는 작은 시행착오들 앞에서, 여성들은 훨씬 더 취약해지는 겁니다. 게다가 고객이 "여자 말고 남자 보내라"는 말이라도 한다면 그냥 그대로 무너져 버릴 수 밖에 없죠. 정말 난 안되는 가보다 싶으니까요. 그 상태에서 남자 동료가 "여자들은 너무 약해, 사무직이 더 어울려"라는 말이라도 한다면? 더러워서 그만두는 사태가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IT에 여자가 없을 만한 거죠. 그래서 힘들고 어렵지만, 이 사회에 대한 반례로써 묵묵히 서있을 더 많은 문과 여자들이 필요합니다. 사실 그들도 잘 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이 사회와 더 많은 여자들에게 알려야 하니까요.
극도의 불안감과 위축감, 그리고 내가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절여진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절대 넘을 수 없을 것 같이 보였던 언덕들을 별 무리 없이 지나가는 경험을 반복하며 이제야 겨우 약간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언덕을 넘을 때에는 항상 다른 여자 엔지니어—전공 무관—가 있었습니다. 밤 새기를 두려워 않고 기술적 탐구를 멈추지 않는 그들을 보며 늘 마음 속으로 혼자 위로를 얻었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저에게 영감과 용기를 주는 동료 여성 엔지니어들의 이야기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더불어 힘을 얻어가셨으면 합니다.
아래 링크는 한 번 확인해보실 만한 커뮤니티들입니다. 미국발 여성 IT 관련 커뮤니티이고, Women Techmakers와 Girls in Tech, Women Who Code 는 한국 지부 페이스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SheCanSTEM: https://shecanstem.com/resources/
WomenTechmakers: https://www.womentechmakers.com/
Girls in Tech: http://girlsintech.org/
Women Who Code: https://www.womenwhoco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