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이의 IT이야기 프롤로그
여대에서 정치학과 심리학을 전공했습니다. 회사 때문에 학위는 못 받았지만 미술사에도 관심이 많은 인문학도였습니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꾸었지만, '무엇'으로 그걸 이룰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무작정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꿈을 더듬어보지 않으면 지금 내 본위를 확인하기 대단히 어려운, 직장인 1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IT 업계에서, 엔지니어라 불리우며. 인프라 운영 엔지니어가 공식적인 업무이고, 이에 더해 회사 자체 프로젝트에서는 풀스택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블록체인 기술에 관심을 갖고 개발자로 전향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술적 전문성을 쌓고자 퇴근 후에 고군분투하고 신기술에 눈을 반짝이다가도, '회사'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주는 좌절에 빠지면 "월급이나 받자!"고 외치는 무한루프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천운이 따랐고, 알 수 없는 우주의 기운에 이끌려 오게 됐다는 말씀 밖에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처음에는 대학원에 가서 학문을 계속 할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책에서 보는 사람들 중, 세상에 선한 영향을 주는 사람들은 대개 박사 학위가 있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렇지만 학문과 실천의 괴리를 학교 다니는 내내 느꼈습니다. 길을 잃고서는 그냥 돈이나 벌자는 생각으로 취업 준비를 시작했고, 운 좋게도 취준 첫 학기에 외국계 대기업 전환형 인턴에 합격하게 됐습니다.
사실 회사에 대단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라, 그냥 전공 무관이라고 되어 있던 지금의 부서를 골라서 썼습니다. 컴맹에 가까웠던 사람이다 보니 무식하게 준비했습니다. 3년치 기사는 모두 다 읽었고, 회사의 제품을 대략적으로라도 다 외웠고 무조건 달달달 말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스터디에 나가 IT를 많이 아는 분들께 팁도 많이 얻었습니다. 대망의 최종 면접날, 준비한 대로 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가당치도 않게 "우리 회사에는 왜 오고 싶었어요?"라는 단골 질문에서 눈물이 빵 터졌습니다. 감동적이게도 면접관 중 한 분이 저를 데리고 나가, "OO씨가 마음 편히 얘기할 수 있을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곽티슈 통을 붙잡고 더 서럽게 울었죠. "내가 이렇게 좋은 회사를 최종 면접까지 와서 떨어지는구나!!"
이 에피소드를 말할 때마다 같이 취준을 하던 사람들은 "아..ㅠ 그래도 울지는 말지..ㅠㅠ 너무 아깝다ㅠㅠ"라는 반응을 일관적으로 보였습니다. 아, 내가 정말 떨어져버렸구나 이런 생각에 폐인 같이 지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결과는 합격. 게다가 지원자 중 유일하게 면접관 전원이 찬성한 합격자—라고 나중에 들었습니다—였습니다. IT의 I도 모르던 사람이 심지어 면접 날 눈물까지 보였는데도 IT 공룡급 회사에 들어가다니, 신비로운 힘이 이끌었다고 밖에는 말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1년 동안은 회사 다니는 게 즐거웠고 주말마다 출근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회사에 입사했다는 게 믿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Process Compliance 관리자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IT 서비스라는 게 어떻게 돌아가고, 서비스 수준 유지를 위해 어떤 일들을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모든 게 새로웠죠. 그런데 기술을 모르니까 제가 컨트롤해야 하는 분들에게 휘둘려서 스트레스 받고, 뭔가 이 업계에서 굉장히 겉도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서버 관리자 역할로 커리어 전환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믿고 지원해주셨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비전공자인데다 무경력자이기까지 한 사람을 갑자기 기술직에 넣어준다니, 감사한 일이었죠. 기존에 그 일을 하시던 분들이 우려의 뜻을 비추셨으나 멈추지 않았습니다.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 같았달까요. 직무 이동과 함께 송도에 있는 데이터센터로 다시 발령을 받았고, 그 후로 2주 뒤에 집을 구해 자취까지 시작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데이터센터에서 일하는 것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지루한 일이었습니다.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니 재미있을 리 없죠. 게다가 장애라도 났다가는 새벽에 부리나케 뛰어와야 하니 부담감도 컸고 짜증도 났습니다. 그리고 운영 업무 전반적으로 팽배해있는 "내 일 아니면 됐어"라는 분위기가 저를 많이 힘들게 했습니다. 우리 팀의 업무 범위에 있지만 조금이라도 OS 영역에서 벗어나면 전혀 모른다는 것이 디폴트였습니다. 저는 '내 것'에 관련된 건 웬만하면 다 알고 싶고, 새로운 일에 관심이 많고, 뭐든 배우고 싶고, 다른 사람들이 뭐 하는지 굉장히 궁금한 사람이거든요. 이전까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저의 '자리함'이 문제가 되는 것도 굉장한 스트레스였습니다. 어디 세미나를 들으러 가려고 해도, 사내 교육에 가려고 해도 "너무 자리를 많이 비우는 것 같다"라는 피드백을 받으니 굉장히 피곤했습니다. 고객과 함께 있다는 건 삶의 질이 수직 하강하는 것이구나, 우리는 암만 대기업이어도 '을'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출근하는 것도 싫고, 이 회사가 나를 성장하게 해준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퇴사해야겠다는 진지한 고민도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운영 업무를 하면서, 닥치는 대로 새로운 프로젝트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개발 프로젝트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레거시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개발하는 것 밖에는 하지 못했고, 조금 더 '힙한' 기술을 많이 쓰고 싶었던 저는 팀원들과 부딪히기가 부지기수였죠. 개발을 잘 모르니 계속 졌습니다. 회사가 지겨워졌죠.
사실 회사가 싫은 것보다도 제가 가장 힘들었던 점은, 컴퓨터공학적 사고를 하는 공학적 '나'와 사회과학적/인문학적인 충전이 필요한 '나'의 충돌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좌뇌와 우뇌를 같이 돌리려니 둘 다 잘 안 도는 것 같달까요. 저는 책도 읽고 감상문도 쓰고 혼자 눈물 흘리는 시간도 필요한데, 이제는 그 시간에 개발 공부하고 콘솔에 떨어지는 에러 메시지들과 사투를 벌여야 하죠. 그런데 그렇다고 개발이 제 마음대로 됩니까? 그렇지 않죠. 8시간 쏟았는데 to do list 하나 간지나게 뽑지 못하는 제 스스로를 미워하면서 약 8개월 정도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인문학적인 재충전도 되지 않으니 '생각하는 근육'은 약해져갔죠. 쉬는 시간에는 그냥 인스타그램에 몰두하며 시간을 허비해버렸습니다. IT 업계에 대해 점점 품게 되는 의구심과 저만의 철학들은 제 안에서 떠다닐 뿐, 그 형체를 갖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브런치를 시작합니다. 제가 이 업계에서 1)문송한 여자로서 기술적 전문성을 채워나가는 이야기(==일상)를 기록하고, 2)IT가 제시하는 환상적인 미래를 감상하고 3)그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인문학적 문제들을 제기하려고 합니다. 표류하는 생각들에 형체를 주어 곁에 머무르게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있다면, 부디 외로움은 더시고 앞으로 가는 힘을 나누어 가질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