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듣기에 맥락이 달라 보이는 이 글을 이직 3부작에 넣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직이라는 것 자체가 내 가치를 시장에 증명해 보인다는 것이죠. 즉 이직하는 순간만큼은 나는 나 자신, 그리고 나의 지난 경험을 세일즈 한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지난 저의 경험은 밤샘, 노가다, 뭐 많은 것들이 있지만 사실 ‘여자’로서의 고군분투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 고군분투를 잘 봉합하여 ‘인정’ 받고 커리어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 지금 시점에서, 제가 여자인 엔지니어로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나누고 싶어 이 글을 3부작에 함께 담았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겨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너무도 좋겠지만 사실 지금도 이겨냈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불편한 상황들을 감내하며 또 한 발짝을 뗄 뿐입니다.
남초 IT 업계에서 여자 엔지니어로서 '인정' 받기
송도 데이터센터에서 일할 때 저는 고객 사이트를 운영 대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객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의 유지보수 엔지니어들이 오는 것을 왕왕 봤습니다. 그들은 그냥 관련 팀과 잠깐 만나고 할 일을 신속하게 마친 다음에 소리 소문 없이 돌아갑니다. 다른 팀인 경우 누가 왔는지 가는지도 모르고 지나가버리는 일상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두가 한 엔지니어 팀을 주목하고 그들이 집에 가는 시점까지 지켜보는 때가 있었습니다. 20대로 보이는 아주 젊은 여자 엔지니어 둘이 온 것입니다. 그날 작업하는 곳에 기웃거리고 한 번 씩 눈으로 흘기는 것은 물론 담배 피우는 무리들은 그 엔지니어들에 대해 아주 즐겁게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누가 더 예쁘네, 뭘 하고 갔네, 이런 얘기에 더해서 당연히 “남자친구 있대?”라는 얘기까지 합니다.
여자 엔지니어가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얘기 들어본 적 없으신가요? “xx에서 엔지니어가 왔는데 걔는 진짜 뭐 아는 게 없더라. 여자였는데...” 늘 사족으로 따라붙었던 “여자였는데”를 저는 기억합니다. 만약에 그 단서가 화자에게서 나오지 않았을 때에는 “여자야?”라는 되물음 역시 기억합니다. 보수적인 데이터센터여서 그런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부정적인 엔지니어의 모습에 여성의 라벨을 붙이는 일은 소위 말하는 개방적인 문화의 업무 환경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가 기분 나쁘고 마는 일, 그런 말 하는 사람이 조금 이상하네 하고 넘어가는 일 이상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긍정적인 여성 롤모델은 너무도 절대적으로 부재하는 반면, 이런 부정적인 롤모델이 쉼 없이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축적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 때 롤모델이라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는 허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부정적인 모습에서 ‘여성’의 모습을 찾는 이야기를 들어도 “나는 그런 사람들과 전혀 다르고 내가 잘하면 되는 거지. 왜 사람들의 그런 말에 신경을 써?”라고 실제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들은 제가 알지도 못하게 제 두 발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거침없고 목적 지향적이었던 내가 언젠가부터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내가 할 수 있을까?”를 무심코 생각하고 있을 때야 비로소 제 발이 더 멀리 가지 못하도록 붙들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내가 언제부터 이랬었지? 충격을 받았죠. 구글 면접을 준비하면서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극에 달했습니다. 리쿠르터에게 연락을 받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코딩 테스트라는 것을 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실무 개발은 이제 어렵게나마 할 수 있더라도 알고리즘은 전혀 몰랐습니다. 남들 몇 년에 걸쳐 공부하고도 따로 과외까지 받는 게 알고리즘이라던데, 개발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비전공자인 제게 쉬울 리 전혀 없었습니다. 합리화를 최대한 걷어내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좌절했습니다. 그런데 그 좌절은 도를 넘었습니다. “나는 원래 안될 애였고 여기까지 온 거에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었나 봐. 지금까지 재능도 없고 입만 살아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던 건가 봐”라고 생각했거든요.
사람의 강함은 “그냥 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음.. 그냥 해보지 뭐”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관점에서 꽤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코딩 테스트 앞에서 나는 평소처럼 이겨내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걸까, 버거웠던 이직 과정에서 나를 ‘그냥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즉 나를 약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궁금해졌습니다. 무엇이 저를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반응이 나오게까지 했을까요? 정외과 졸업하고 서버 엔지니어도 했고 개발도 했는데, 왜 갑자기, 다 해놓고서 이직하려고 애쓰고 있는 마당에?
저는 그 전환의 과정에서 늘 고정관념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겁니다. 눈을 크게 뜨고 둘려봐도 여자는 그냥 존재 자체가 한 줌입니다. 뭔가 하려고 하면 나에게로 쏠리는 지나친 관심, 숨 쉬듯 접하는 성차별적 발언들. 저는 스스로 이런 것들을 밟고 일어서겠다고, 그런 말들은 나를 강하게 하는 ‘동력’이라고 부르며 정신승리했지만 사실은 남들보다 더 적은 작업 기억을 풀가동하며 살아온 겁니다. 어느 한 켠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던 부정적인 여성의 모습이 ‘어쩌면 나도 그럴지 몰라’라는 생각으로 너무도 쉽게 이어지게 된 거죠. 그래서 한계에 달했을 때 페달 놓고 쉰 다음 다시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빠져버리는 겁니다. 조금만 더 분발하면 될 일 앞에서 필요 이상의 좌절과 회의로 더 쉽고 더 잘게 박살나버린거죠.
고정관념 위협이란, 어떤 사람이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집단의 부정적 고정관념에 부응할까 불안해하는 현상입니다. 1995년에 최초로 학계에 보고되었습니다. 그 연구를 수행하던 시점에는 흑인들은 IQ가 낮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명문대 재학 중인 흑인 대학생들에게 문제를 풀게 했는데, 이때 특정 실험집단에는 IQ 검사 일부라고 알려주었고 다른 통제 집단에는 그냥 물어보는 질문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똑똑한 사람들이었는데도 실험 집단의 점수가 확실히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 뒤에 다음 실험에서는 시험지 전면에 인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배치만 했는데도 성적 저하가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이 뒤로 여성의 수학 성적, 노인들의 기억 능력 등등에 대한 고정관념 위협 연구가 이어졌고 인지심리학 분야에서 지난 20년 간 활발히 연구되어 왔습니다.
이런 고정관념 위협은 왜 발생할까요? 고정관념을 상기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정신적인 처리를 하느라 주어진 과제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이론입니다. 인간은 단기적으로 외부 정보 처리를 할 때 작업기억이라는 것을 사용합니다. 근데 이는 한계가 있는 영역이고, 고정관념 위협 상태에 있는 사람은 이 한정적인 자원의 일부분을 사실상 못쓰는 상태가 되는 건 거죠. 저만 해도 사실 “이런 상황이 내가 주니어라서 발생하는 걸까, 여자라서 발생하는 걸까? 내가 여기서 이렇게 말하면 되게 멍청한 여자 같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늘 지냈으니까요.
이런 맥락을 생각해 봤을 때 일단 엔지니어 자리에 있는 여자들은 남성 엔지니어 대비 상대적으로 더 취약한 상황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직 시장에서는 사실 조금 더 취약하지 않나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결혼했냐” 내지 “결혼 계획 있냐”라는 질문을 하는 면접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 터지고 목청도 터지는 치열한 기술 면접을 넘고 넘어서, 뭘 해봤냐는 의심의 눈초리와 결혼의 시험까지 모두 넘어서 오퍼 레터를 받아도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습니다.
같은 조직에 있던 다른 여자 엔지니어가 이직을 했습니다. 그는 사실상 거의 한 팀을 책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퍼포먼스를 내는 사람이었고, 밤샘과 주말 출근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실력도 당연히 있는 사람이었죠. 그가 인터뷰 과정이 빡세기로 업계에서 유명한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저는 인정의 박수를 쳤습니다. 그가 떠나는 것은 아쉽지만 정말로 그를 위해 잘된 일이고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그를 보내고 난 뒤 충격적인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가 있던 팀에서 “걔 얼굴 예뻐서 뽑힌 걸 거야 분명히”라고 이야기를 한고 다닌다는 거죠.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팀에서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어서 사실상 일을 그분 혼자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이야기가 여기저기 퍼져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던 당시의 저에게까지 들려오는 과정에서 그의 실력, 열정,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포부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의 ‘예쁜 얼굴’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눈물 쏙 빠지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시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아도 여자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여자로 남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가 겪은 화나는 일도 있습니다. 지금 회사는 90%가 남자일 정도로 남초인 조직입니다. 그런데 유독 주니어 레벨 팀인 저희 팀만 저 포함 전원 여자였고, 그 뒤를 이어 남자 한 분이 채용이 됐습니다. 팀 hiring manager는 남자를 훨씬 더 편하게 생각하는 남성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엔지니어로서의 기준과 조직이 필요로 하는 사람에 대한 정의가 명확한 분이라 채용 과정에서는 정말로 공정하게 그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만 뽑고 그 누구도 그 이전까지는 채용 결과에 대해 가벼운 반감 내지 짇궂은 농담도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농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팀 매니저는 여자만 뽑는다고. 그 뒤에 들어온 남자분은 매니저의 그런 기준을 넘어서 들어올 정도로 대단한 분인가 보다 고. 불쾌하지만 티 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은 부서 전체 행사가 있었는데 매니저들에게 공개적으로 QNA를 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손을 들더니 “이건 가벼운 질문인데요, xx팀은 성별만 보고 뽑는다는 게 사실인가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회사는 기술적 검증을 정말 철저히 하는 회사입니다. 그전까지는 한 번도 의문의 대상이었던 적 없는 이의 기준과, 다른 모두와 동일한 수준의 검증을 공정하게 마친 엔지니어들의 지난 커리어 자체가 저희가 여자라는 이유 만으로 이렇게까지 도마에 오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편파적인 팀 성별 분포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부서 자체의 남초 현상은 왜 그 누구도 농담 삼아서라도 지적하지 않았을까요?
여성에게 인지적으로 위협이 되는 상황은 IT 업계에서 사실 계속될 것입니다. 많은 책들에서 당신을 여성 중 한 명이 아니라 독특한 자신의 가치를 가진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세요, 따위의 조언을 줍니다. 그렇지만 ‘주니어’이자 ‘여자’이자 ‘엔지니어’인 데다가 ‘페미니스트’이기까지 한 저는 그렇게 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주니어이기 때문에 응당 거쳐야 하는 일들과 시니어들의 조언 앞에서도 불필요한 불편함을 느끼고, 다른 남성 주니어들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개발자가 될 수 있을지만 고민할 때 사이드 프로젝트에 몰두할 때, 저는 거기에 더해 여성으로서의 내 정신 챙기기까지 해야 하니까요. xy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언제나 브런치 글을 마무리하면서는, “그래도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맥락의 말로 맺습니다. 왜냐하면 저 정말 계속할 거거든요. 버텨내고 있는 것인지 이겨내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재미있으니 지지 않고 계속해보려고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고 계시는 모든 분들에게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