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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전씨 Jul 14. 2020

여자의 일(3) - 싹싹하고 센스 있는 거 그만 하자

되도록 싹싹하고 센스 있는 여직원 만큼은 절대 되지 말자

여자의 일 5부작


1. 들어가며

2. 자리 보고 존버합시다

3. 싹싹하고 센스 있는 여직원 만큼은 절대 되지 말자

4. 회고는 건조하게 딱 한 번만

5. 제발 여성 리더십 보고 부드럽다고 하지 마세요



싹싹해봤자 결국 당신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2015년 7월, 처음으로 회사 문을 들어섰을 때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나는 뭐든지 다 훌륭하게 해낼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내 매력으로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어머님, 아버님들의 마음을 휩쓸었던 파워 과외 선생이었고 40대 중반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별 노력 없이 한 말에도 과장부터 상무까지 다들 꺄르르 자지러지니, 나원참 별 수 없구만 다 나에게 사랑에 빠지게 해버려야겠구만! 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지 발싸개 같은 생각을 하면서 신입사원의 오랜 시간을 보냈다. 막내 업무라는 것이 없던 곳에서 그런 일을 만들어내어서 했다. 센스 있는 커뮤니케이션과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ㅎㅎ내지 이모티콘은 필수였다. 휴가를 다녀오면 싹싹하게 간식 챙겨서 사서 다 돌리고, 카톡에 회사 상사 생일이라고 뜨면 자발적으로 메시지도 보내고 뭐 그런... 게다가 실제로 업무도 못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실제로 의문을 제기했을 정도로 나는 사랑 받는, 싹싹하고 센스 있는 신입 여직원이었다. 



나는 여자들이 침묵을 연습하기를 바란다. 회피하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의 시선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법을 배우기를.


<출근길의 주문>에 나온 구절. 이런 말을 내가 신입사원 때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회사가 나에게는 안전한 공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필터 없이 많은 얘기를 하고 다녔다. 조금의 침묵이라도 흐르는 때가 되면 나는 망설임 없이 나서서 조잘거렸다. 예를 들면 남자친구가 있고 뭐 언제 여행을 가고 근데 입사하고 나서 헤어졌고... 뭐 이런 것들. 지금 그 시절의 나를 만난다면 등짝을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잡일도 스스럼 없이 도맡아 하고 뭐든 YES하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회사에서 자리매김했다. 이 이미지는 겉으로 보기에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 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1.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것은 습관이라서 웃지 말아야 하는 순간에도 웃게 된다. 어느 술자리였다. 어떤 부장은 자리가 부족하다며 자기가 내 무릎 위에 앉겠다고 했다. 다른 어떤 부장은 내 이마를 밀며 "니가 뭘 알아"라고 말했다. 내 옆에 앉은 다른 부장은 팔을 내 의자에 걸치고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습관적으로 웃는 것 뿐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얼떨떨하게 웃는 것 밖에는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그 때의 나는 싹싹하고 사랑 받지 않는, 문제를 제기하고 분위기를 박살내 버리는 스스로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2. 슬픈 일이지만 경력이 쌓일 수록 냉정해져야 하는 순간이 매번 온다. 요청 기한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냉정하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일, 내 업무 범위가 아닌데 해줄 수 없겠냐고 알랑방귀를 뀌는 사람에게 거절하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온다는 말이다. 신입사원 시절의 나는 이런 일이 있으면 거의 애교를 부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부드럽게' 말하고 싶었으니까.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니 너무 바빠서 그렇게 할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정확하게 사무적으로 내가 할 말 만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그래서 내가 퇴사하는 시점에 들어야 했던 말은 "쟤 신입 사원 때는 안 그러더니 싸가지가 없어졌어"였다. 이렇게 어차피 욕 먹을 거면 그냥 애초부터 못되게 굴 걸 그랬어 아주.


3. 어떤 커리어적인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필연적으로 파장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내가 나간 자리를 채용한다든지, 채용이 되기까지는 누가 추가적인 업무를 해야 한다든지. 당시의 나로서는 이런 것을 감당하는 것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가는 자리는 내 마음에 꼭 드는, 욕심 나는 자리이기를 바랬다. 내가 팀 이동을 하겠다고 손을 들었을 때 내게 온 자리는 '구려 보이는' 자리였다. 웃으면서 YES 밖에 할 줄 몰랐던 나였음에도 망설였다. 그러자 매니저가 한 말은 "나는 지원이라면 당연히 OK할 줄 알았어, 워낙에 적극적이잖아"라는 말이었다. 이게 뭐 대단한 말이냐고 하겠지만, 그 말은 마법 같이 내가 '그러겠다'고 하게 만들었다. 그런 기준에 맞춰 살아왔고, 이번에도 맞춰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팀을 옮기고 나서, 그렇게 말했던 팀장과 바보 같이 홀려버린 나 자신을 죽도록 욕했지.


이 상황과 거의 동일한 사례가 <내_일을 쓰는 여자>에 소개돼서 깜짝 놀랐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게 새삼 놀라웠다. 해당 부분을 발췌해보았다.

“그동안 항상 도와줬잖아요.”
“무슨 일 있어요? 이런 일에 항상 가장 먼저 지원하지 않았나요?”

이런 말은 당신이 원래 성격과 반대되는 일을 했고, 그동안 해오던 대로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뜻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당신은 좀 더 ‘자기다운’ 행동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낄 수도 있다. 당신은 긍정적인 변화를 이루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그동안 해왔던 대로 하리라 예상한다. 당신의 앞길을 막는 행동을 계속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좋은 해결책은 이전 모습대로 행동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당신이 새로운 습관을 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회는 순응적이고 센스 있는 여자 노동자를 원한다. 남자의 보충제 같은 역할을 해주기 바라는 것이다. 나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해보았고 그게 커리어 욕심이 많은 나에게 어떻게 방해가 되는지 몸으로 겪었다. 처음에 싹싹하지 않기란 너무나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예쁨 받고 싶고 자리 잡고 싶으니까. 그렇지만 거기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나는 나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업무 방식을 바꿔보고 있고, 니가 그 방향에 익숙해져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말해야 한다. 당!연!히! 절대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일단은 당신이 지금 싹싹한 상태라면, 말수와 행동을 지금 하는 것의 1/3 수준으로 줄여보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좋겠다.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말하고 다니기

사실 가장 큰 싹싹한 여직원의 함정은 칭찬에 "아니예요~"로 답하고, 자신의 공적은 "별 거 아니"라고 하게 되는 데에 있다. 그러면 같이 입사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 못해 보이는 동기가 월급을 더 받는 사태가 조용히 발생하게 된다. <내_일을 쓰는 여자>에 내 뼈를 너무 쎄게 때린 말이 있어서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다.


공적을 내세우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볼 때, 그들보다 자신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경력에 도움이 안 된다. 그저 안전지대 안에 머무른 채 변화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합리화하게 될 뿐이다. 왜 다른 사람들에게 공적을 드러내지 못하는지, 드러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은 자화자찬하지 않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기뻐한다. 이로 인해 승진 대상자 명단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ㅡ마셜 골드스미스, 샐리 헬게슨, <내_일을 쓰는 여자>

나는 진짜 칭찬은 내 뒤에서 나 모르게 하는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여기에 더해서 내가 나서서 내가 뭘 잘했어요 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알 사람은 알 것이며, 나를 진중한 실력자라고 여겨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용한 실력자들끼리 비밀리에 서로를 인정하는 눈빛을 주고 받고 조용히 등 두드려주는 것이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지혜 작가가 <출근길의 주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견실한 당신이 침착하게 ‘관심 비즈니스’를 손에서 내려놓으면, 그것을 ‘자기과시형 사기꾼형 미치광이’들이 냉큼 채간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도덕적 우월성과 조용한 인정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한테 돈을 주든지 승진 시켜서 명예를 주든지 하지 않으면 미안하지만 내 시간을 투자할 가치는 특별히 없다. 사회적 위신이 대단히 중요했으면 직장 안 다니고 다른 거 했겠지. 그러니까 인정하자, 우리 돈 벌려고 회사 다니는 거니까 내가 목표하는 바가 뭔지 명확히 하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요구하자.


여성이 분명하게 의사표현하는 법을 익혀야 하는 이유 중 하나를 나는, 억울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나는 당신이 ‘충분히 암시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은 요청들’을 쌓지 않기를 바란다.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하면 좋겠다. 우리는 통하니까, 저 사람은 똑똑하니까, 내가 선의로 대하면 나를 선의로 대해주리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막무가내로 베풀고 실망하지 말자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가도, 말과 글을 분명히 하다 보면 어슴푸레 마음속에 있던 것이 또렷해진다.
ㅡ이지혜, <출근길의 주문>


현실적으로 이렇게 하려면 어떤 걸 시작해야 할까? 


1. 내 업적의 데이터 포인트를 찾는 것이다. 이건 데이터에 돌아버린 우리 회사의 분기별 실적 보고(?) 같은 개념으로 하고 있는 것인데, 귀찮기는 하지만 내가 뭘 요구할 수 있을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우리 회사에서 요구하는 게 무엇이고 나는 어떤 상황(S)에서 어떤 일을 해야 했는데(T) 실제로 어떤 것을 해서(A) 이렇게 대단한 결과(R)를 냈다는 것을 정리하는 것이다. 내가 뭘 요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 여기서부터 시작해보면 좋겠다.


2. <내_일을 말하는 여자>에는 당장에 시작해볼 수 있는 현실적인 팁들이 많다. 내가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1)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2) 내가 무엇을 성취했는지, 3) 내 목표는 무엇인지 머리 속에 갖고 있는 것이다. 누가 툭 치면, 중요한 사람을 엘레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가볍게 얘기해볼 수 있는 정도로.



세 줄 요약

1. 싹싹해봤자 결국 돌아오는 건 영원히 싹싹하라는 요구, 조금만 스트레스 받아서 신경 못 쓰면 바로 싸가지 타령.

2. 그러니까 싹싹할 에너지로 성실하게 내 업적 기록하자.

3. 목표를 구체적으로 엘레베이터 스피치할 정도로는 갖고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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