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마세요, 악의에 대해서는 언제나 36계 줄행랑
여자의 일 5부작
2. 자리 보고 존버합시다
3. 싹싹하고 센스 있는 여직원 만큼은 절대 되지 말자
4. 회고는 건조하게 딱 한 번만
5. 제발 여성 리더십 보고 부드럽다고 하지 마세요
전문성도 능숙함도 아닌 ‘젊은 여자’가 필요한 자리가 있었고, 그 자리는 그런 자리였다.
이다혜 작가가 <출근길의 주문>에서 쓴 문장이다. 자신이 일했던 어느 팀에서 여자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팀 내에서 나이로 줄을 세워보면 본인이 분명 하위권인데 이상하게 여자 중에서는 늘 가장 나이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1년 동안 세 명이 앉더라는 것이다. 성별에 관계 없는 전문가 자리와는 다르게, '젊은 여자'가 필요한 자리. 얼마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고, 더 심하게는 없어도 되는 자리. 그 자리에 올 여자들의 '커리어'라는 것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다.
나는 이전 직장에서 IT 인력 서비스를 하는 부서에 있었다. 내가 이전 직장에서 들은 말 중에 가장 어이 없는 이야기는, "여기는 여자인 게 유리해"라는 말이었다. 왜 그런고 이유를 들어보니, 고객이 "여자를 넣어주세요"라고 요청한다는 것이다. 기술력이 없는 신입사원은 어디 넣어서 교육은 해야 하고, 고객들은 능숙한 전문가를 원하기 때문에 신입사원 투입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있던 부서는 신입사원을 어디에 잘 배치할 것인가가 큰 숙제 중 하나인데, 여자 신입사원은 찾는 데가 많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내가 고객사에 나가야 할 때가 됐을 때 정말로 모든 곳에서 쌍수를 들고 반겼다. 과장을 섞어 자기 월급 깎아 자리 만들어주겠다는 팀장도 있었다. 고객사에 나간 뒤 나는 짧은 시간 내에 내게 할당된 업무를 잘할 수 있게 됐다. 어딘지 이상해서 매니저에게 요즘 너무 한가하다,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 그는 내게 "그럴 땐 연애를 해봐"라고 말했다.
2018년 가을, 머리가 조금 컸을 시점. 송도 데이터센터에서 썩고 있었던 나는, 당시 내가 함께 일하던 팀장에게서 뜻밖의 이직 제안을 받는다. 이직이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간절했던 내게, 꽤 괜찮은 회사의 "영어 잘하는 여자"를 뽑는 자리가 나타났다. '고객에게 제안 발표하러 가서 대충 좋은 게 뭔지 알려주고 꿈과 희망을 주는 빵빠레 부는 자리'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때의 나는 거기를 벗어나는 것을 너무나 원했기 때문에 지원하고 싶었다. 지금은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가 "엔지니어면 기술력을 요구하는 게 좋은 자리죠"라고 말해줘서 정신을 차리는가 싶었지만, 그래도 지원을 했다. 그리고 내 이력서가 접수되고 나서 머지 않아 그 자리는 사라졌다.
'젊은 여자'를 필요로 하는 자리는 다시 말하면, 만만하게 부려 먹을 수 있으며 겉으로 보기에 반반해서 거부감이 들지 않고 눈치를 잘 봐서 알아서 뒤치다꺼리 해주는 자리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젊은 여자'를 고용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자기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악의는 정말로 악한 의도를 절치부심하여 품어야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한 치의 의도랄 것도 없는 철저한 무지도 악의다. 그것을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가스라이팅 하는 것도 악의다. <출근길의 주문>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단연, "가장 좋은 전략은 36계 줄행랑. 악의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정답"이라는 말이다. 어떤 종류의 단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리는, 이상하게 너무 한가하고 업무적으로 정체된 것 같다고 느낄 때 연애를 해봐야 하는 자리는, 젊은 여자가 존버 씩이나 해줄 필요 없는 자리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자리 찾기의 터널이 지나면, 그래도 내가 한 몸 뉘여볼 자리는 나타난다. 그러면 일단 버텨봐야 한다. 앞서 말한 '단련'이라는 것은 가치 있는 모든 것에 동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능숙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재능과 능숙함은 다르고, 후자는 무조건 꾸역꾸역의 나날이 필요하다. 버틴다고 뭐가 되지는 않지만, 그런 보장은 없지만, 재미없는 걸 참아내는 시간 없이는 재미가 오지 않는다.
<출근길의 주문>에서 이다혜 작가가 담담하게 '존버'를 말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우리는 주어진 일을 천재적으로 잘하지 못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다혜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프로가 된다는 것은, 꾸준히 단련하고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일정한 아웃풋을 만들 수 있으며 자기 자신과 타인의 실력과 능력치를 가늠해 협업에 용이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연재물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이슬아 작가가 말한 것처럼 재능 없는 꾸준함 만큼 모두가 할 수 있으면서 대단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건조하게 물기 싹 빼고, 내가 오래 그리고 멀리 그리고 되도록 높이 갈 수 있기를 도와줄 만한 무기를 얻을 수 있을 만큼 버텨보자.
나는 지난 5년 간 단련의 양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렇지만 내 브런치가 2018년에 시작된 것은, 그 과정에서 나 스스로를 너무나 많이 다치게 했기 때문이었다. 뭘 얼마나 잘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서 불안에 떨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 같아서 초조했다. 그 시점에 나를 물 속에서 끌어올려 살려준 말은 제현주 대표의 <일하는 마음>의 한 구절이었다.
그럴 때 주어진 구체적인 ‘어떻게’의 목록은 나에게 ‘일을 잘한다는 것’의 명확한 정의를 내려주었다. 그 덕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사안들을 걱정하는 대신, 오늘 당장 부딪히는 내 일의 현장에서 어떻게 일해야 할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제현주 대표가 말하는 것처럼 "특정 기술을 익히기 위해 어떤 세부 동작이 필요한지 분절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면 판에 박힌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떤 부위에 자극이 들어와 하는지 모르고 운동을 하면 애먼 곳만 발달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단련의 자극점을 찾고 현실적으로 달성 가능한 아주 구체적인 목표를 지정해야 한다. 너무너무너무 뻔한 말이지만, 진짜 극세사급 섬세함으로 구체적이게 적어야 한다. 예를 들으면 어떤 영상 보고 x, y, z 주제를 가지고 기술 블로그 3개 샘플 코드 붙여서 작성하기 같이. 이 부분은 2018년 회고에서 적은 부분이 있어서 혹시 더 궁금하신 분은 함께 보시면 좋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단련을 깨끗하게 포기 하는 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꾸역꾸역을 꽤 잘하는 사람이다. 내가 시스템 설계에 대해서 제법 능숙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꾸역꾸역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죽었다가 깨나도 자료구조와 알고리즘을 이용해 코딩 테스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도저히 꾸역꾸역이 되지 않았다. 근데 나는 야망에 진심인 사람이라서 포기한다는 게 나 스스로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그냥 몰라도 되는 거면 넘어가겠는데, 이건 이직을 생각하면 내 발목을 계속 잡아서 포기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아주 구체적인 임계치를 정했다. 3번 이상 시도하였는가? 지금 5번 포기했는가? 이걸 정한 게 2018년 12월이었다. 그리고 나는 2020년 7월, 포기했다. 깔끔하게. 내 인생에 알고리즘 테스트를 보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단점 채우려고 진심으로 노력해봤는데 잘 안됐다면 되도록 장점을 단련시키자는 것.
세 줄 요약
1. '여자' 찾는 자리는 그 진의를 잘 한 번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누울 자리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2. 자리 찾았으면 일단 어느 시점까지는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서 달성해나가며 버티니까 좋더라고요.
3. 그렇지만 포기도 깔끔하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