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블 수업을 지도하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이것저것 열심히 설명해야 하는 다른 과목들에 비해 쉽다면 쉬운 면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각자 열심히 자기 파트를 연습해 오고 여러 번 반복해서 합주를 하면,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곡의 스타일과 편곡, 그루브 등을 몸으로 익히게 됩니다. 조금만 들으면 원곡과 어느 정도 가깝게 연주하고 있는지, 아니면 대충 적당히 뭉개면서 마지못해 하고 있는 과제 같은 상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건 아니지, 다시." 하고 반복시키거나, "리듬을 좀 더 정확하게 연주하라구, 드럼은 빨라지지 말고." 정도의 코멘트를 하면서 한 학기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재즈 앙상블은 조금 상황이 다릅니다. 음원 속의 연주를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연주를 하기 시작하니 좀 더 집중하고 들어내야 합니다. 같이 연주를 하게 되면 직접적으로, 몸으로 바로 느껴지는 게 있습니다. 학생들의 의견도 끊임없이 물어봅니다. "이건 어떻게 느껴졌니, 나는 아까 그 부분에서 조금 더 기다리면서 천천히 빌드업해 가는 게 나을 것 같던데, 너는?" 하면서 말입니다. 같은 소리를 들었지만 감정적으로는 서로 다른 반응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명의 의견을 들어봅니다. 선생의 입장에 서 있으니 제가 먼저 강하게 의견을 내면 학생들은 생각을 멈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끊임없는 음악적 선택을 이어가며 소리의 공간을 채워가는 게 재즈 연주이고, 각각의 선택은 같이 연주하는 이와 듣는 이의 감정에 미세하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서로의 연주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건 만만치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서로의 감정에 상처를 내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건 아닌데’ 하는 느낌을 갖는 건 쉽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문제인지, 어떤 점을 개선하면 음악이 더 좋은 소리를 내게 될 것인지를 바로바로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삼자가 되어 관찰만 하고 있어도 까다로운 일인데, 같이 연주하는 상황이라면 더 어려워집니다. 게다가 같이 연주를 한 친구들은 각자의 악기에 있어서는 다들 전문가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종종 피상적인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그래도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하면 훨씬 더 좋은 음악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걸 잘 전달하기 위해 애쓰며 조심조심 수업을 이끌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음악이 확 펼쳐지는 경험을 종종 합니다. 그럴 때 느껴지는 희열은 만만한 크기가 아닙니다. 물론 학생이 지금껏 열심히 연습과 연주를 통해 쌓아 온 내용이 충분히 많을 때 가능한 얘기입니다. 한 가지 사고의 전환이 바로 드라마틱한 소리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요.
수업시간에 많은 얘기를 하게 되는데, 제가 하고서도 ‘야, 이건 제법 괜찮은 표현인데’하고 깜짝 놀란 게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까먹지 않으려고 신경을 써서 이제는 제 마음속에 명확하게 새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매 학기 초에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악기를 통해 만들어내는 음표가 나의 연주의 최종 단계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건 중간 단계 어디쯤에 위치한 것이라고 믿어보자. 내 솔로는 내 연주의 종착점이 아닌 거야. 내가 연주하는 것은 상대방인거지. 내 악기를 통해 만들어낸 소리로 결국은 상대방을 연주하는 거야.”
시간이 갈수록 재즈라는 음악이 가진 집단성이랄까요, 몇몇의 사람이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 음악의 표면에 흐르는 명확한 주고받음도 있습니다. 솔로 주자가 더 빠르고 복잡한 멜로디를 연주하면 드러머도 같이 에너지를 올려가는 것 같은 것 말이죠. 하지만 가끔씩 그보다 더 나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오는 연주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마치 상대방이 나를 연주하고, 내가 상대방을 연주하게 되는 날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