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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창 Oct 11. 2023

재즈란 무엇인가




  매 학기 '재즈의 역사'라는 대학원 과정의 수업을 한 지도 벌써 오륙 년이 되었다. 역사가 매 학기마다 새로 바뀔리는 없으니 대체로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는 면이 있기는 해도, 수업은 시간이 쌓여가는 것에 따라 조금씩 진화하고 있다. 한 번 수강하고 지나가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그걸 느낄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첫 시간에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동일하다. '재즈란 무엇인가?' 하는 것. 그 질문을 붙들고 한 학기를 끌고 가는 수업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통 모를 일이나, 언제부턴가 “재즈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하는 질문은 밈이 되어버렸다. 멜 토메가 던지는 질문에 적당한 대답을 찾으려 생각하던 엘라 핏제랄드가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은 있을 수 없다는 듯 스캣 솔로로 대답하고, 다시 그걸 멜 토메가 이어받는 영상을 화두로 삼아 수업을 시작하곤 했었다. 하지만 샵밥 두비두바, 하는 영상이 이제는 식상한 느낌인가 싶어 굳이 수업시간에 틀지 않는다.


  새삼 부러운 건, 재즈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내가 하는 노래, 이게 바로 재즈라구요, 하고 들려주는 그들의 확신에 찬 태도다. 보통 재즈를 정의하려는 사람들은 스윙 리듬과 블루스적인 요소, 그리고 즉흥 연주가 중심이 되는..... 이런 식으로 몇 가지 음악적인 특징을 들어 설명하곤 한다. 제법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따져 묻기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의 반론에 가로막히곤 한다. 스윙 리듬이 아닌 다른 리듬을 활용해서 연주하는 재즈는 그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식으로 말이다. 현대의 재즈에서는 블루스적인 표현이 잘 들리지 않는 것도 많은데, 그러면 그건 더 이상 재즈가 아닌가, 하는 질문도 떠오른다. 그만큼 재즈는 경계선이 흐릿한 음악이다.


  하지만 엘라 핏제랄드와 멜 토메의 노래 뒤에는 '그런 논쟁 따위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죠, 이게 바로 재즈라니깐요.' 하는 뜻이 숨어 있었고, 객석의 사람들은 너무도 타당한 설명이라는 듯이 웃고 박수치며 공감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마일스의 음악은 그냥 마일스의 음악이라고 하면 되지 왜 굳이 거기에 이름을 붙여서는 다른 음악이랑 죄다 뒤섞어버리는지 모르겠다던 게리 바츠의 가벼운 투덜거림이 떠오른다. 재즈건 뭐건 그저 음악으로 듣고 느끼면 되는 걸 왜 골치 아프게 따지고 있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재즈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붙들고 대학원생들과 몇 달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나눠본다. 100년도 넘게 끝없이 벽을 허물어가며 발전해 온 음악을 두고 내가 감히 '여기까지는 재즈, 저 선을 넘어가면 이제 재즈는 아니지'하고 규정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보다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재즈란 어떤 것일까 하며 더욱더 본질을 찾아 안쪽으로 파고들어 가는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나에게 재즈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고민에 빠져들게 하려 애쓴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이미 프로페셔널하게 연주활동을 지속하는 친구들이 상당수이다. 학자가 되어 탄탄한 논리를 쌓아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글의 형태로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생이 아니란 얘기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교수라는 직함을 얻게 되기는 했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더 좋은 연주자로 성장하는 것, 우리에겐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재즈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집요하게 붙들고 고민하는 것이 나와 학생들의 연주를 성장시켜 줄 것인가? 이 질문에 확신을 갖고 답하지 못한다면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재즈라는 음악에 빠져들어 나름 평범하고 순탄하던 인생이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 건 1990년대 초반이었다. 정확히는 1993년 1월 3일 -혹은 4일이다, 기억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 흘렀다- 인데, 그날이 처음으로 이태원의 올댓재즈에 발을 들인 날이었다. 오래전 얘기다.


  당시에도 음악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케니 지의 음악이 재즈네 아니네 하면서 서로 싸우고 있었다. 유독 케니 지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이유는 그의 음악이 재즈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재즈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세련되게 인스트루멘탈 팝, 이렇게 돌려 말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때만 해도 스무드 재즈나 컨템포러리 재즈로 불렀던 듯하다. 재즈의 한 하위 장르로 분류된 그의 음악은 워낙에 많이 팔리는 베스트셀러였다.


  한참 뒤에 보게 된 영상이지만, 팻 메씨니가 케니 지의 음악이 재즈를 대표하는 것처럼 된 것에 대해 제법 살벌한 독설을 퍼부은 적도 있었다. '재즈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인 모양이다.


  그런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제는 대상이 바뀌었다. 로이베이(Laufey라고 적길래 로페이겠군, 하고 믿고 있었는데 아이슬란드 이름이라 로이베이가 그나마 비슷한 발음이라고 한다)의 음악이 재즈인가 하는 것으로 또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는 걸 본다. 물론 로이베이의 음악은 적지 않은 인기가 있다. 매력적인 젊은 여자 가수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오래된 스탠다드 곡들을 부른다는 것, 어떻게 보면 특별할 게 없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또 신선한 느낌이다.


  생각해 보면 한참 전에는 그런 논쟁의 대상이 노라 존스였다. <Don't Know Why>를 부르던 시절의 노라 존스를 두고 비슷한 얘기들을 했었다. 그다음에는 라라랜드의 음악, <City of Stars>이기도 했었다. 재즈 클럽에서 가끔씩 신청곡이라며 곡 제목이 적힌 메모가 무대 위에 올라오기도 하는데, 십중 팔구는 그런 곡목이다. 재즈라는 장르의 경계선을 밟고 이쪽저쪽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음악은 이렇게 몇 차례씩 유행처럼 왔다가 지나가며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재즈의 심장과도 같은 음악은 오히려 소외된다고 할까, 그게 존 콜트레인이건 카운트 베이시이건 말이다. 재즈가 너무 소중한 이들은 그게 마음 상하는 것일 테다. 이 좋은 음악을 두고 하필이면 왜 그런 걸 듣니? 하는 심정으로 말이다. 뭐, 이쪽저쪽 다 이해는 간다. 나도 나이가 제법 들었으니까.






주호민 님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수업에 사용했을 그 영상.



뭔가 대단히 빡친 듯한 팻 메씨니.




Adam Neely, 너무 좋아하는 음악 유튜버인데 그도 Laufey의 음악을 두고 재즈란 무엇인가 하는 논쟁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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