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어린이 집에서 데려 나와 곧바로 지인이 운영하는 동네(라고 하기엔 우리 동네에서 참 멀지만 그래도 규모나 성격이 동네 책방이기에) 책방으로 향했다. 아이는 지상철 타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보다 나와 지상철을 타면 아이가 보여주는, 세상 모두를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는 걸 나는 더 좋아한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차를 두고 굳이 버스를 한번 타고 지상철 역으로 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또 내려서 서점까지 걸어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할 정도. 아무튼 그래서 아이와 소풍 같은 오후를 보냈다. 동네 책방이라 그런지 지인의 지인들이 많이 와있었고 처음 보는 아이에게 호감과 어른의 따뜻한 애정을 표현하는 게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아이는 아주 잠깐 낯을 가리다가 한껏 신나게 재롱을 부리며 이쁨을 받고 왔고 오는 길에 조금 내 체력이 달린다는 생각을 했지만 괜찮았다, 아주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누린 뒤였으니까.
남편도 제시간에 퇴근했다. 체력이 좀 달리는 탓에 아이 목욕을 부탁했다. 그동안 나는 남편의 저녁식사로 물냉면 밀키트를 조리하고 고기를 조금 구웠다. 아이를 다 씻기고 나서 재울 준비를 끝낸 남편과 나는 다시 교대, 내가 아이를 재우러 들어갔고 남편은 저녁을 먹었다. 오후 책방 소풍이 자기도 고단했는지 아이가 금방 잠든 탓에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재우고 나오니 남편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마루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며 쉬고 있었다. 남편이 저녁 먹은 그릇은 싱크대에 놓여있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하루종일 일하고 오자마자 아이를 씻겨줬으니 얼마나 쉬고 싶겠어. 생각했다. 조리대 위에 밀키트 부스러기들이 좀 남아있어서 조금 신경이 쓰였다. 간단하게 방에 들어가 저녁 요가를 하고 설거지를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밀키트 부스러기도 그때 치우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피곤한 탓에 난도가 낮은 요가를 선택했고 끝낸 뒤 개운한 마음으로 나왔다.
남편은 컴퓨터에 앉아 무슨 영상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남편이 있는 방을 지나 설거지를 하기 위해 주방으로 왔다. 많지는 않지만 쌓여있는 그릇들, 갑자기 남편이 아이가 남긴 카레를 긁어먹고는 그 그릇에 물을 채워놓지 않아서! 그래서! 노란 카레가 버쩍 말라있는게 엄청 확대되어 보였다. 아, 빡. 아까 봤던 밀키트 부스러기들이 또 신경 쓰인다. 아, 빡. 혹시 놓친 설거지거리가 없는가 마지막으로 식탁을 확인하는데 식탁에 이런저런 양념과 부스러기들이 묻어있다. 닦지 않은 것이다. 아, 빡. 저녁을 먹고 뱀이 허물 벗듯 자신이 먹은 그릇만 싹 들고 그 모든 자리를 빠져나와 마루에 누워 핸드폰을 켜는 남편을 상상했다. 아, 썅.
기분 좋은 오후를 보내고 수월하게 아이를 재우고 정갈하게 요가까지 하고 나왔는데 갑자기 화난다. 뭐든 간에 갑자기 부르르 끓어오른 것은 위험하다. 국물도 주식도 화도 그렇지 않은가. 갑자기 입꼬리를 한껏 내리고 만지는 모든 물건에 힘을 주어 큰 소리를 내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아니 먹었으면 기본적인 건 좀 치워야하는 거 아닌가. 내가 밥하는 사람도 아니고 아니 대체 저렇게 쉬는 동안 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아니 지가 안하면 내가 해야하는데. 머리속에서는 난리가 났다. 설거지를 요란하게 하고 행주를 던지고수납장 문을 팍팍 닫고. 정말 못난 모습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이지만 급하게 갑자기 팍 오른 화를 푸는 것에는 이것만 한 행동이 없다. (정말 고쳐야 한다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잘 되지 않아 괴롭다.) 방에서 영상을 보던 남편이 슬슬 눈치를 본다. 가끔 부부싸움(이라기엔 일방적인 나의 지랄이지만...)을 할 때면 남편은 내 눈치를 보는 게 힘들다고 말했다. 그 말이 떠오르며 아니, 눈치를 보면 뭐 하나. 눈치를 보기만 하고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으니 눈치를 보는 지도 괴롭고 계속 비슷한 문제로 지랄하는 나도 괴로운 게 아닌가. 정말. 눈치가 없으면 아예 없던가 눈치가 있으면 좀 고치던가. 정말.
뭐 아무튼 그래서 남편은 쭈구리 같은 모습으로 한껏 눈치를 보며 자러 들어갔다. 이제 티 낼 사람이 사라졌으니 중요한 건 내 마음이다. 예전에는 기분이 나쁘면 그곳에 계속 머무르며 화를 내고 원망할 상대를 찾고 분풀이를 하며 지난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다고 내가 나아지는 건 없다는 걸 최근에 느꼈다. 나쁜 기분에 나를 오래 두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인가. 그래서 요즘은 나를 너무 오래 나쁜 기분에 두지 않으려 한다. 얼른 지금 이 글로 남편 뒷담화를 하면서 동네 책방에서 포장해 준 피칸파이를 달밤에 먹으면서 자꾸 좋은 기분을 채우려 노력 중이다. 힘들고 빡치는 마음으로 열심히 마감한 주방도 꽤 깔끔하니 마음에 든다. 다 내가 했다. 그 나쁜 기분 한가운데서. 다음 부부싸움에 쓸 아이템 하나도 이렇게 쟁여뒀다. H.P가 늘어난 것이다. 후후.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동네 책방에서 찾아온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며 잠들 것이다. 나쁜 기분은 좋은 기분으로 대처할 수도 있지만 아름다운 것으로는 대처 뿐 아니라 나를 더더더 좋은 곳으로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요 며칠 피곤하고 지치는 마음에 아름다운 것을 찾아다녔지만 육아와 임신이 일상이 묶여있는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아름다운 다른 곳으로 떠난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