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상을 수정하는 법
"그냥 둬."
프리젠테이션 리허설을 앞두고 제안팀 내부 리뷰를 했습니다. 오타도 몇 개 찾고, 헤드메시지(문서 상단에 해당 페이지를 요약하는 글)가 매끄러운지도 점검했습니다. 대략 점검할 것은 다 한것 같아 문서를 닫으려는데 한 주니어 컨설턴트가 머뭇거리며 손을 듭니다.
"잠깐만요."
수 십개의 눈이 그녀를 향합니다.
"12페이지 좀 열어주세요. 네, 거기. 여기는 핵심화두 세 번째에 '시스템 정리'라고 되어 있는데 20페이지 가주시겠어요. 여기 핵심키워드에는 '고도화'라고 되어 있어요. 왠지 앞 뒤가 안 맞는 느낌이에요."
의심이 놀라움으로 바뀝니다. 이 녀석은 앞으로 꽤 크게 될 것 같습니다. 진심을 담아 대단하다는 칭찬 포인트를 듬뿍 줬습니다. 그래서 문서 취합하는 PMO(프로젝트 진행조직)가 수정을 하려는 순간 그대로 두라고 했습니다. 먹잇감을 남겨 두고 싶었습니다. 아마 이 불일치를 눈치챈 주니어 컨설턴트도 이걸 찾은 순간 짜릿했을 겁니다. 쉽게 찾아지는 오타같은 것이 아니거든요. 조금 뒤 만날 늙은 하이에나들은 더 그럴 겁니다. 서로에게 이 사냥에서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어필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때때로 약간 의도적으로 오타를 숨겨두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리스크가 있습니다. 된통 당할 수 있거든요. 문서 전체를 싸잡아 완성도를 지적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다르죠.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찾았을 때 짜릿하고 지적하면서 우월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보물을 그냥 지우다니요. 회의가 끝날 때, 시니어 컨설턴트는 저를 보고 웃었고, 주니어 컨설턴트들은 아직 의아한 표정입니다. 아마 이해가 안 갈 겁니다. 결국 누군가는 짚어 낼 오류를 왜 그냥두는지 이해가 안 갈 거거든요. 그들은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오류가 없을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오타나 저런 불일치는 그냥 수정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걸 찾지 못하면 프로젠테이션의 전체 구조를 물어뜯을 수 있습니다. 그건 너무 아찔하고 아픕니다. 곧 있을 임원 리뷰를 준비하면서 중얼거립니다. "제발 요것만 물어뜯어라."
현황분석(프로세스 컨설팅의 초반 활동으로 고객사의 현재 상황을 분석하는 단계) 결과를 고객에게 설명하는 날입니다. 고객에게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컨설턴트가 작성한 산출물을 선보이는 자리라 조금 긴장이 됩니다. 오늘은 특히 더 긴장이 되는데 웬만한 베테랑 컨설턴트도 말문이 턱 막힌다는 음님이 오신답니다. 모든 말은 '음'하고 시작하셔서 그렇게 불린다는 그 분이 우리한테도 온겁니다. 그 분의 페북 자기소개에는 '40년 중공업 외길인생'이 볼드체로 크게 붙어 있었습니다. 첫 페이지를 열고, 한 5분쯤 얘기했을까요. 그 분의 솔로가 시작됩니다.
"이건 안 맞고, 저건 이미 다 해봤고... 새로 다 해야 될거 같은데..." 이미 큰 충격을 먹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받아칩니다.
"그럼 어떤 부분이 문제이실까요?"
"다 문제라 딱히 어디를 고쳐야할지 말할 가치도 없어 보이는데... 음"
내 안의 거친 생각이 터져나오려는 순간 같이 일하는 동료 컨설턴트가 무릎을 꾸욱 누릅니다. 침을 한번 삼키고, 잘 아는 오래된 형님 이야기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 형님은 대단하신 분이시거든요. 이태리에서 일하시던 미켈란제로 형님이십니다. 다비드 상을 완성하고 작업을 의뢰한 고객측의 심사원이 점검을 하러 왔습니다. 요리조리 보던 심사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뭔가 이상하다고 합니다. 딱 뭐라고 찝을 수는 없는데 뭔가 이상하다고... 마치 우리 주위를 맴도는 그 분들처럼... 미켈란젤로 형님은 노련했습니다. 저처럼 욱하지 않았죠. 조용히 작업대를 타고 올라갑니다. 손에는 조그만 대리석 한 덩이를 몰래 쥐고 있었죠. 그리고는 다비드상의 여기 저기를 다듬는 척하면서 손의 들린 대리석 부스러기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렇죠. 이제 완벽하네요." 그 시모노시키 출신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날 음님의 날카로움을 찬송하는 소리는 더 높았습니다. 제 파트너 컨설턴트가 그 쪽에서는 타고 났더라고요. 저희도 만들면서 '이게 맞나?' 찝찝했던 부분을 똭똭 짚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며... 저는 속이 메스꺼웠지만 다행히 잘 참고 넘어갔습니다. 그러고는 다음 날부터 1시간씩 음님을 초빙해 현황분석을 봐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상황은 예측하고 있었죠. 음님은 우리 자료를 자세히 보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2분을 못 넘기고 자기가 1시간을 꽉꽉채워 말할것이다. 예측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저희는 열심히 받아 적는 척을 했지요. 그러고는 자료의 헤드라인 메시지 몇 개만 인공지능을 돌려 말을 둥그스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 주에 다시 리뷰를 했습니다. 현황분석서는 하나도 바꾸지 않고요. 결과는 뭐 비슷합니다.
정말 좋아졌네요. 진작 이렇게 했어야지...
다시 속이 부글거렸지만 기분을 얼굴에 그리지 않고 싼 미소를 흘립니다. 그 이후 한동안 저희 쪽은 음님의 비호를 과분하게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