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내린다

by 여유수집가

삼 주만이었다. 수요일 올레길 걷기 모임에 참석한 것이. 올레길 완주가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고, 걷는 여행을 무엇보다 좋아하고, 길반장까지 맡고 있기에 이 모임만큼은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이가 아파서도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야 할 일도 조정 가능한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주 연속 올레길을 걷지 못했다. 술래잡기 때문이었다.


요즘 이 동네 인기 놀이는 술래잡기다. 달리기가 서툰 하이디는 너무 자주 술래가 됐고, 술래가 돼서도 다른 누군가를 잡지 못해 술래를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점점 싫어지는 술래잡기. 처음에는 친구들과 놀기 위해 참아가며 해봤지만 더는 참기 싫어진 상황. 다른 놀이를 제안해보라고도 했지만 하이디에게 그럴 용기는 아직 없었다. 깜깜해진 뒤에도 집에 들어오기 싫다던 하이디의 귀가가 점점 빨라졌다.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시작하면 하이디는 내게 전화를 했다. 이제 데리러 오라고.


올레길 모임 멤버들은 대부분이 학부모인 애데렐라 신세. 아이를 등교시키고 9시에 출발해 아이의 하교 시간인 3시까지 집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모임은 운영됐다. 이를 위해 10km가 넘는 코스는 전반부 후반부로 나눠 걸었다. 처음에는 3시까지 돌아오는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코스를 하나씩 완주할수록 3시까지 집에 돌아오는 일은 어려워졌다. 올레길은 제주도 바깥 테두리를 빙 둘러 걷는 길이기에 출발지와 도착지가 점점 집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한 시간 넘게 출발지로 이동했는데 짧게 걷고 올 수는 없는 일. 한 코스를 세 개로 쪼개는 것은 불가능했다.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3시에서 4시로 한 시간이 늘어났고, 점점 더 늘어날 예정이었다.


하이디의 귀가 시간이 빨라진 즈음 올레길 모임 전날 나는 하이디에게 부탁했다. 내일만 꾹 참고 술래잡기를 하면 어떻겠냐고. 너무 자주 술래를 하게 되면 누군가에게 한 번쯤 대신해달라고 부탁해보면 안 되겠냐고. 아니면 이번만 용기를 내서 다른 놀이를 하자고 말해보면 어떻겠냐고. 내 눈빛이 너무 간절했을까. 아니면 내 말투가 너무 단호했을까. 하이디는 그러겠노라 다짐을 했고 주먹 불끈 쥐며 파이팅까지 외쳤다. 그리고 난 한 톤 높은 아이의 파이팅 목소리를 믿고 즐겁게 올레길을 걸었다.


듣고 싶은 대로 들었던 엄마. 한 톤 높은 하이디의 목소리는 굳은 다짐이 아닌 떨리는 불안이었다. 술래잡기가 시작되고 결국 하이디는 엄마와의 다짐을 하나도 실천하지 못한 채 주변을 빙빙 배회하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마 엄마에게는 걸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영문도 모른 채 내게는 남편의 카톡이 쏟아졌다.


하이디한테 전화 왔어. 엄마 올레길 가서 안 왔다고.
내가 회의 중에 갑자기 안 오던 시간에 전화가 왔길래 뭔가 하고 불안해서 급히 받았더니 그렇게 말해서 나도 당황했고.
가급적 하이디 하교 시간에 맞춰서 도착하는 일정이면 좋겠네. 걱정되니까.
술래잡기하기 싫어하는 애를 억지로 하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올레길 멤버의 남편이 하이디를 그 집에 데리고 가서 그 집 아이들과 놀게 하는 것으로 사건은 해결됐지만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다시 돌아온 올레길 모임. 이번 코스를 봐도 다음 코스를 봐도 세 시까지 집에 도착하는 것은 무리이기에 이 주 연속 올레길 걷기를 포기했다. 하이디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이 하이디에게 화살로 돌아갈까 다른 핑곗거리를 만들었다. 꼭 수요일이 아니어도 되는 하이디의 친구 초대를 수요일로 못 박고, 조정 가능한 마감인데 마감 역시 수요일로 못 박고 글을 썼다.


평소 친구들과 씩씩하게 잘 어울리는 아이라면 굳이 올레길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거다. 친구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잘 말하지 못하는 아이, 먼저 친구에게 다가가기 어려워하는 아이이기에 더 마음이 쓰였다. 무거운 마음으로 초조해하며 걷느니 아이 옆에 있기를 택한 거다. 그게 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엄마, 올레길 안 걸어도 괜찮아?" 수요일에 친구를 초대하라고 하니 하이디가 물었다. 엄마에게 하이디가 제일 소중해서 괜찮다고 답했다. 그다음 주에도 올레길에 안 간다고 하니 하이디는 또 물었다. 괜찮냐고.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했다. 엄마는 하이디 곁에 있는 것이 제일 좋아서 괜찮다고.


올레길에 함께 하지 못한다고 톡을 남기는 화요일, 싱숭생숭했다. 내가 너무 아이를 여리게 키우는 것은 아닐까.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한데 내 행복을 너무 쉽게 포기한 건 아닐까. 혼자 걷기는 위험해서 누군가와 함께 걸어야 하는데 그 올레 코스를 걷는 기회가 다시 내게 올까. 하지만 하이디의 괜찮냐는 질문에 싱숭생숭함은 사라졌다. 엄마의 마음을 모른 척 하지 않는 하이디이기에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날이 올 거라 믿게 됐다.


그리고 지난 화요일, 다음날 걸을 올레 코스를 살펴보니 다른 날과 비슷하게 10km 정도였지만 평탄한 길이 많아 빨리 걸으면 세 시까지 집에 도착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조심스레 하이디에게 물었다.


"엄마 내일 올레길 걸어도 될까? 아무리 늦어도 세 시 반까지는 올 거야."

"그래!"

"괜찮겠어? 친구들이 술래잡기하면 뭐 할 거야?"

"책 읽으면서 기다리면 돼."


엄마가 올레길을 가면 뭐하면서 기다려야 할지 미리 생각해뒀던 걸까. 하이디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혹시나 내가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아이의 신호를 놓치는 걸 수도 있기에 한 마디를 보탰다.


"내일 아침에 다시 물어볼게. 엄마는 안 가도 되니까 하이디가 생각해보고 싫으면 내일 아침에 다시 말해줘."


수요일 아침, 하이디는 여전히 흔쾌히 다녀오라고 나를 보내줬다. 혼자서 책 읽는 건 집에서 하는 게 더 좋지 않겠냐고 물으니 다른 놀이를 찾아보겠다고도 했다. 그래, 술래잡기하지 않는 아이가 한 명 정도는 더 있을 수 있겠지. 하이디가 이렇게 흔쾌히 대답하는데 여기서 주저앉는 것도 아이의 마음을 외면하는 일이 되겠지. 합리화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주워 담고 올레길에 나섰다. 삼 주만이었다.


아홉 시에 집에서 출발해 한 시간 이십 분을 달려 도착지에 차를 주차하고, 다시 출발지로 택시를 타고 이동 후 걷기 시작. 평소대로라면 두시 무렵 완주가 예상됐다. 점심을 먹으면 세 시. 다시 집에 돌아오면 네 시 이십 분. 평소대로 걸을 수는 없었다. 나는 제일 앞에 섰다. 아무리 늦어도 세 시 반까지는 오겠다는 하이디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일 앞에서 평소보다 보폭을 넓혀 씩씩하게 걸었다.


이번 길은 올레 8코스 후반부로 중문색달해수욕장에서 대평포구까지였다. 초반부터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졌지만 주저함 없이 저벅저벅 올랐다. 계단은 두 칸씩 성큼성큼 올랐다. 빨리 걷는다고 자연이 주는 감동을 담을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걷는 속도를 높이며 하나라도 놓칠세라 두 눈에 더 꽉꽉 눌러 담았다. 걷는 속도와 감동의 크기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물론 혼자 걷는 길이 아니기에 한 번씩 뒤를 돌아 일행들을 살폈다. 다행히 일행들은 전부 내 시야를 벗어나지 않았고, 제일 연장자께서 빨리 걸으니 더 운동이 되는 것 같다는 말로 내 발걸음을 가벼이 해주셨다.


완주 시각, 한시 삼십 분. 점심도 조금 서둘러 먹기. 도로 상황도 오전보다 더 좋아 나는 세 시 반에 집에 도착했다. 하이디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약속은 지켰지만 '아무리 늦어도'라는 단서를 붙인 시각이었기에 서둘러 하이디에게 전화를 했다. 데리러 가겠다고. 하지만 하이디는 벌써 왔냐고 물으며 조금 더 놀겠다고 한다. 그렇게 삼십 분이 더 흐르고 나서야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제 데리러 오라는 하이디였다. 혼자 책을 보고 있었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었단다. 한 살 어린 동생과 그림을 그렸다고. 재미있었다고. 재잘재잘 그림 그린 이야기를 하는 하이디의 표정이 밝았다.


이날 걸으며 봤던 가장 근사한 풍경은 짙은 구름을 비집고 바다 위에 내리는 햇빛이었다. 작게 뚫린 틈을 놓치지 않고 선명히 길을 드러내며 내리는 빛. 틈 너머 하늘은 파랗다고, 빛 내린 바다는 은빛이라고, 빛 닿은 구름은 더는 회색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빛. 그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별빛이 내린다' 노래를 '햇빛이 내린다'로 개사해 불렀다.


햇빛이 내린다
샤랴랄라라랄라 샤랴랄라라랄라
샤랴랄라라랄라 샤랴랄라라랄라
쏟아져 내린 바다 그 위로
쏟아져 내린 엄마 맘 위로
쏟아져 내린 아이 마음이
이렇게나 자라 버렸고


하이디의 자란 마음을 느꼈던 그 빛이 다시 만난 하이디의 얼굴에도 내려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엄마도 재미있었다고. 오늘 하이디처럼 예쁜 바다를 보고 왔다고. 그 바다에 하이디 마음처럼 예쁜 햇빛이 내렸다고. 내가 건넨 사진을 보며 하이디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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