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듣다,

단편. 5화.

by 흩날림문고


자고 일어난 오늘은 어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꼭 시리얼 같아. 마을 이곳저곳에 부서진 콘크리트 건물의 잔해가 가루가 되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교장 선생님의 집은 무너졌고, 동네에서 가장 큰 슈퍼는 지붕이 주저앉아 식료품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블라드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미용실 유리창도 산산조각이 났고 파편이 벽에 박혔다. 어떤 것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고, 어떤 것은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살이 발라진 뼈처럼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난 것도 있었다. 길에는 탱크에 밟힌 모든 것들이 공장에서 찍어낸 것 마냥 일정한 각인을 새겼다.


어젯밤 폭격 소리는 무시무시했다. 다행히 아이의 집은 시내에서 떨어져 있었기에 폭격을 피할 수 있었으나 이곳은 예외였다. 소냐와 아이는 귀를 막고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생각보다 폭격소리가 컸고 견디기 어려웠다. 고막이 찢어질 수도 있나? 땅이 무너진다면? 히어로 영화는 모두 거짓말이었다. 불꽃이 터지고 건물이 무너지는 전쟁터에 뛰어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그 난리통에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도망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봐야 등 뒤에 총알이 꽂힐 것이 분명했다.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수업시간에 배운 대로 움츠리고 머리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살아남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아이는 소냐를 꼭 껴안았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박동이 피부로, 핏줄을 타고 전해졌다. 아이는 안도했다.


이상한 것이 있다면 어젯밤부터 볼로디미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제는 그를 찾으러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루를 어디서 무얼 하며 보내는지 아이는 알지 못했으나 그는 늘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추어 집에 돌아왔기에 궁금해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상했다. 문득 아이는 그 눈이 떠올랐다. 사라지기 며칠 전 볼로디미르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식사 시간에 늦지 않게 집에 돌아왔다. 달랐던 것은 그의 기이한 행동이었다. 이 추운 날에 달리기라도 한 것일까. 한겨울임에도 땀에 절은 옷을 벗어 두고는 냉수를 들이켰다. 그는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호흡은 짧았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한참을 부엌과 거실을 서성이며 어딘가에 골몰해 있었다. 그는 멈춰야 할지 서야 할지도 모르는 듯했다. 그러다 다리의 떨림이 기어코 휘청이게 할 때면 고개를 숙여 소리가 나도록 허벅지를 손으로 내리쳤다. 그는 다리를 부러트리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다시 움직이게 하려 했을까.


볼로디미르는 현관을 나서려다,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초조하게 만들었는지는 전혀 예상이 가지 않았다. 볼로디미르는 눈알을 굴리다 불현듯 자신의 시선을 쫓는 아이와 마주했다. 그 순간 그 눈이 보였다. 나약한 소리 하지 마. 그의 말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아이는 문득 내 눈은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집을 떠나고 없었다. 아이는 그의 눈을 떠올렸다. 평생 마주한 적 없는 낯설고 연약한 눈이었다. 아이는 난생처음 그의 후회를 목격했다.


아이는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어디에도 볼로디미르는 없었다. 사람은커녕 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문득 학교가 가고 싶었다. 소냐는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 볼로디미르는 분명 학교에는 없을 터였다. 그는 학교를 싫어했으니까. 아이를 포함해 그 자신, 그의 형제들, 그의 부모가 다녔을 학교였지만 싫었다. 그는 처절하게 이 학교, 이 동네가 싫었다. 타티아나는 아이가 태어나고 닷새 후 릴리가 하늘로 떠났다고 했다. 할머니는 자신과 똑 닮은 검은 생 머리의 왜소한 아이를 받아 들고 하염없이 울었다고 했다. 왜? 슬퍼서? 글쎄. 그리움 아니었을까. 사무치게 그리우면 수치가 되고 열등감이 되는 걸까. 볼로디미르는 학교가 싫었다. 금발 머리의 거인들이 바글거리는 그곳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러니 남기로 했던 그를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학교는 밖에서 보아도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도서관이 있던 자리는 절반 이상이 무너졌고 책들은 쏟아져 있거나 재가 되었다. 잘됐다. 이제 책을 빌려야 할 필요도 없네. 아이는 웃음이 났다. 아이는 도서관 근처를 지나 입구를 찾았다. 입구가 소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교실에 두고 온 목도리나 찾을 계획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보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 볼로디미르가 그의 외출을 알게 될 리 만무했다. 아이가 들어서자 천장에서 가루가 떨어졌다. 묘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구멍이 뚫린 천장 사이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렸다. 아이는 빛의 인도를 받을 작정이었다. 마치 아군을 구출하러 가는 히어로가 된 듯이. 아이는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계단을 밟고 난간에 손을 대려는 순간, 그 순간이었다. 이런 건 배운 적이 었었다.


손 떼고 물러서!


아이는 놀라 뒷걸음질을 쳤고 눈앞으로 학교는 무너져 내렸다.

아이는 비명을 질렀다. 아직 발 한쪽이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허공에 개 짖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의식이 돌아오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별이었다. 얼마나 누워있었던 건지 다리가 무감했다. 고통도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토막 같았다. 동상에 걸린 걸까? 아무렴 어때. 배가 고프다 못해 쓰렸다. 하긴 어제부터 먹은 게 없구나. 소냐는 말없이 그의 머리맡에 배를 깔고 누워 꼬리를 흔들었다. 너도 배고플 텐데. 너라도 가지 왜. 소냐는 이마를 핥는다.


오랜 시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누워 있으니 볼 수 있는 것은 천장뿐이었다. 밤하늘의 별. 처음 알게 된 사실은 모든 것이 잠든 밤 속에도 생명은 끝없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개미의 다리, 흔들리는 잎사귀, 흩트리는 바람, 그리고 잠들지 못하는 숨. 밤하늘은 차등 없이 날을 가리지 않고 눈이 부셨다. 그럴 리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수업시간에 몰래 읽은 과학책에서는 폭발이 생기면 먼지구름이 뭉쳐 별이 된다고 했다. 별은 용암처럼 뜨겁게 끓고 있으며 그 빛이 이렇게 환하게 빛나는 것이라고.


아이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 우리도 저 멀리서는 그저 환하게 빛나는 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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