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6화.
아무래도 집중이 되질 않았다. 요새 들어 미세한 소리들이 자주, 크게 들려왔다. 저녁 식사를 하며 본 뉴스에서, 지나가다 전광판에 뜬 속보에서, 수업을 들으려 펼친 역사 교과서에서까지. 아주 작은, 그래서 누군가는 듣지 못할 그런 소리들이 뭉쳐 끊임없이 불어났다.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될 때까지. 소녀는 책을 덮었다. 이게 다 밖에서 들리는 티비 소리 때문일 거야. 그게 맞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정신상태를 명확히 표현할 수 없었다. 예민한 수험생을 키우는 집에서 배려가 너무 없었다. 소녀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왜? 뭐 필요해?"
"아니. 볼륨을 좀 줄여달라고. 너무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돼."
"얘, 오늘만 봐줘라. 국가대표잖아. 와서 치킨 좀 먹어. 맨날 어떻게 공부만 하니?"
딱히 치킨이 먹고 싶었던 건 아니다. 닭다리를 집으며 생각했다. 엄마는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타고난 성품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세월이 그것을 강제했는지는 모른다. 그녀는 위기에 강했다. 아빠가 퇴직하고 힘없이 처진 뒷모습을 보였을 때에도, 소녀가 걸핏하면 방문을 걸어 닫는 사춘기 시절을 보낼 때에도, 아파트 청약을 잘못 계산하여 넣은 바람에 당첨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에도. 엄마는 잠깐 울다가도 금세 일어나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인생을 뭐 하러 고통스럽게 살아. 행복하게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 연애도 실컷 하고. 소녀는 그녀의 얼굴을 힐끔였다. 아아. 오버사이드. 탄식하다가도 금세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를 집어 먹는다. 소녀는 엄마가 좋았다. 자신과 대비되는 엄마의 가벼움과 강인함을 사랑했다.
행복하게 사는 것. 그건 어떤 삶일까? 소녀는 자신의 인생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신기하게 남들은 기억도 못하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기억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부모의 맞벌이로 어린 시절은 늘 혼자였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조차 퇴근한 종일반에 남아 유치원의 풀장을 독차지한 일, 엄마의 친구 할머니 집에 맡겨져 보내던 시간들, 그 집 앞의 놀이터와 소녀덕에 식을 줄 몰랐던 그네의 온기, 혈기로웠던 아빠가 화를 참지 못해 종종 부수고는 했던 선풍기와 그 탓에 흘려야 했던 땀, 오밤중에 이모의 집으로 가출하던 순간, 집을 나갔다 돌아온 엄마의 손에 들린 힐리스 운동화, 토요일에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온종일 보았던 투니버스, 가스레인지를 사용할 줄 몰라 대충 부수고 물을 부어 전자레인지에 돌려 만든 눅눅하고 바삭한 라면, 그 맛을 잊지 못해 라면수프를 뜨거운 물에 타서 꿀꺽 마셨던 습관들. 모든 것이 한켠에 조각난 채 끝없이 상영되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그렇듯 자식이라 해도 내면을 모두 끄집어 보기란 불가능했으니 이해했다. 또 인간이란 즐거운 기억은 잊고 아팠던 기억만이 오래도록 남는 법이니 부모님도 억울할지 몰랐다. 어렸을 적엔 그랬으나, 지금은 원망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의 어린 시절도 있었음을, 기운이 넘치던 시절의 고통스러웠을 분투와 수용을 이해했다. 다만 남들보다 예민한 성격, 주기적으로 빠져드는 음울, 남을 들이는 것이 멋쩍고 불편한 그 모든 것이 어쩌면 그때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할 뿐이었다. 타고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기억들이 밝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나는 이해하지 못해 미쳐버렸을 테니까.
혼자가 익숙했다. 그저 나만이 오롯이 남은 이 좁은 세상에서 다른 삶의 이야기를 강박적으로 붙잡았다. 그것은 동화책이었고 주말마다 방영하는 만화였고 그려낸 상상이었다. 흡수하고 또 마셨다.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내 것이 비어 남의 것을 삼키는 인생이 행복할리 만무했다.
"한국, 이겨라! 역전 한번 해 보자!"
맥주를 두 캔 째 따는 아빠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골을 이리저리 몰고 골대로 치닫는 공격수의 양 옆으로 낯익은 선수들이 따라붙었다. 파란 눈과 갈색빛이 도는 금발머리. 순간 아찔한 전율이 핏줄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수리부터 발 뒤꿈치까지. 특히 오른발이.
"골! 골!! 골이다!!!"
아빠와 엄마는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소녀의 집도, 옆집도, 온 동네가, 어쩌면 한 나라가 들썩였다. 모두가 탄성을 내질렀고 기쁨에 겨워했다. 소녀는 일어설 수 없었다. 부모님의 등 너머로 찰나의 실망과 좌절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눈을 뗄 수 없었다. 티비 앞에서 환호하는 부모를 바라만 볼 뿐 함께할 수 없었다.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이 축제에 참여할 자격이 없음을. 소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자신은 한 마리 곰이었다. 아이의 체형을 닮아 밟힐 만큼 작지도 모든 것을 부술 만큼 크지도 못했다. 숲에서 기어 나왔는지 동물원이었을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꿈은 대개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다. 곰은 거리를 배회했다. 시내인 것 같았다. 아직 부서지기 이전인 것으로 보아 아이의 기억 속의 찰나일 것이 분명했다. 곰은 아직은 지붕이 멀쩡이 붙어 있는 시내의 가장 큰 슈퍼에 들어가 튀긴 닭과 빵, 목이 마를 때를 대비하여 음료수 여러 병을 가지고 나왔다. 곰이 손가락이 있었나? 선반을 부쉈을까? 그건 너무 미안하니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곰은 주머니를 뒤져 지폐 몇 장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값은 지불해야 했다.
곰은 깊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은 거대했다. 곰을 온전히 품을 수 있었다. 곰의 존재는 나뭇잎 한 장으로도 충분히 가려졌다. 곰은 안도했다. 이곳에서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겠구나.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겨울이 오고 있었고 겨울잠을 잘 준비를 해야 했다. 곰은 겨우 자기의 몸을 뉘일 수 있는 구덩이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가져온 음식을 주머니에서 꺼내 먹기 시작했다. 끝없는 허기가 느껴졌고 식욕을 멈출 수 없었다. 아무리 먹어도 배는 불러오지 않았다. 결국 그냥 자기로 한다.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다. 겨울잠을 잘 테니까. 겨우내 곰은 안식을 누릴 터였다.
아이는 눈을 떴다. 곰이었는지 꿈이었는지 모를 기억은 이미 사라졌다. 아이는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더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누워 있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볼로디미르가 자신을 찾지 못했나 보다. 어쩌면 그 또한 자신과 같은 처지일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또 버려졌던가. 또? 생각해 보면 버려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돌무더기가 된 마을조차 버려졌다. 엄마 타티아나의 시간도, 할머니 릴리의 시간도 모두 버려졌다.
너의 시간은?
아마도 그것마저 곧. 버려진 모든 것의 무덤 속에 홀로 살아남기란 가능할 리 만무했다. 홀로는 결단코. 문득 아이는 정신을 차렸다. 힘이 샘솟았다. 가까스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깔린 발을 꺼내야 했다. 아이는 안간힘을 써서 돌을 움직였다. 사라졌던 통증이 활기를 되찾았다. 아이는 으스러지도록 어금니를 물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발을 잃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절뚝였다. 밤은 깊었고 한기가 닿은 부위가 고통스러웠다. 피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 덩어리 졌다. 깔렸던 다리 주위로 악취가 진동했다. 기력조차 없었다. 먹고자 하는 욕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바지에서는 지린내가 진동을 했고 추위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