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듣다,

단편. 8화.

by 흩날림문고


아이는 며칠 째 잠이 오지 않았다. 다시 꿈을 꿀 수 없었다. 간절했으나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리 없었다. 그것은 아이가 전쟁 속에서 배운 유일한 교훈이었다. 뜬 눈으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며 날을 새웠다. 야속하리만큼 부지런한 시간은 세상을 깨우고 재웠다. 그 가운데 쉴 수 없는 이는 오직 아이뿐이었다. 볼로디미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죽었는지 돌아올 면이 없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칼을 움켜쥔 팔이 떨리던 순간을 기억했다. 핏줄과 온 세포가 요동쳤다. 군인의 하얀 목덜미가 생생했다. 아이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이의 하얀 눈자위 위로 붉은 실핏줄이 터졌다. 아이는 팔을 치켜들었다.


아이는 창문에 비친 탁자와 그 위에 놓인 은색 식칼을 보았다. 칼날은 날카로웠고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아이는 군인의 짧아진 호흡소리를 기억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아이와 그의 사이에 맴돌았다. 지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칼자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뒤통수에 가려져 있던 그의 눈이 보였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담배를 쥔 손, 하얀 목덜미, 내쉬는 숨이 떨려왔으나 결코 눈을 뜨지는 않았다. 허망했다. 온몸에서 피가 아래로 쏟아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칼을 든 팔을 힘없이 떨구었다.


아이는 볼로디미르도 그 군인도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군인을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평생 그에게는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용서를 강제할 수는 없었다. 감히 신조차도. 다만 끝없이 탐욕을 먹어치우는 세상이 배출한 한낱 쓰레기는 분노를 수용할 자격이 없었다. 분노조차 이제는 장작을 찾지 못해 소멸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는 왜 이런 세상을 위해 죽었을까. 그가 더 사랑했던 건 악이었을까 선이었을까. 그는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이제 아이의 삶에 내일은 없었다. 다만 잠을 좀 자고 싶었다. 고통스러울 만큼 피곤이 온 사지를 깔아뭉갰다. 하지만 그 또한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아이는 깨지 않을 잠을 곤히 자는 소냐를 보았다. 아이는 죽음을 생각했다. 어쩌면 영원한 안식을 얻을지도 몰랐다. 내일은 죽어야겠다. 아이는 다짐했다.








"한술만 더. 응?"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한숨을 뒤로한 채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문 밖에서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대화 속에는 자신이 여러 번 언급되었다. 걱정되는데, 어쩌면, 왜, 무엇을 해야, 병원, 몇 달째, 이러다. 소녀는 다음에는 어떤 조치들이 취해질지 예감했다. 그건 분명 자신에게도 오점일 터였다. 누군가의 짐, 걱정, 동정의 시선, 사라진 희망, 불가능. 자신이 원하지 않았을 것들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했다. 어쩌면 내심 구원을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늪에 빠져버린 자신의 무력한 몸뚱이를 누군가가 건져주기를. 그것이 약이 되었든, 무엇이든.


요 몇 달은 시간이 체감되는 나날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변한다는 진리를 자신의 육체가, 타인이, 세상이 증명했다. 시간의 추상을 어쩐지 만질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빠르게 변했다. 낙제한 수능도, 시작된 새 학기도, 앞집 딸내미의 첫 출근 소리도. 모든 것은 계절을 밟으며 지나갔다. 소녀는 지나갈 수 없었다. 이 순간을 지나칠 수 없었다. 낙오된 이들은 시간의 무심함에 더 철저히 짓밟혔다. 자신마저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머물러야 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느낀 때가."


글쎄요. 작고 이상한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였나. 처음 학원을 땡땡이치고 영화를 본 날이었나. 아닌가. 거대한 침대를 꾼 날부터였나. 아니, 아니지. 전쟁이 시작된 날부터? 그것도 아니면... 곰? 곰이 겨울잠을 잔 순간부터?


소녀는 문 뒤에 서서 엄마의 흐느낌을 들었고 그녀의 자책을 엿들었다. 자신이 더 보살펴야 했다는 자책, 어렸을 때 하고 싶어 했던 미술이 아닌 공부를 권했던 자책, 유학을 가고 싶다는 말을 흘려들었다는 자책.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가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았다. 머물러야 하는 자신을 이해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곳에는. 자신 또한 때로는 이해할 수 없었으니 강요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것은 자신의 이성과 의지, 감정과 육체의 모든 것이 원하는 일이었다. 알았기에 더 사무치게 외로웠다.


"일단 일주일치만 처방해 드릴게요. 상담은 지속적으로 받는 게 좋아요. 다음 주 목요일에 외래 진료가 있으니 그때 뵙도록 하죠. 병원을 왔다는 것만으로도 의지를 보여주신 거예요. 좋아지실 겁니다."


의지.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이 과연 의지일까. 소녀는 약국 앞에 서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다. 한데 뭉쳐 흐르다가도 다시 보면 흩어져 각자의 길을 갔다. 그러다 또 다른 구름의 유영에 합류했다. 어느 순간은 빠르게 혹은 느리게 흘렀다. 검게 물들더니 곧 비가 내릴 듯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잠시 멈춰 서서 우산을 꺼내 들고 이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소녀는 불편했다. 불편함을 넘어서 두려웠고 무력했다. 분명 그 모든 출발에는 힘이 있었다. 시간일지 자연의 섭리일지 초월한 존재일지 모를 힘에 떠밀려 나아가고 있었다. 약 잘 챙겨 먹자. 엄마가 같이 챙길게. 우리 한번 해보자. 엄마의 손에 들린 하얀 약봉지에도 힘이 들어갔다. 소녀는 끄덕였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약을 먹고 낫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시대에 휘말릴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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