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7화.
볼로디미르의 넷째 형, 안드리이는 유독 검은색을 싫어했다. 검은 옷, 검은색 차, 까맣게 태운 고기, 심지어 장례식에 조차 회색 정장을 고집했다. 그의 집에는 검은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건과 가구만 치우면 되었다. 그의 아내는 그만큼 검은색을 혐오하지는 않았으나 없어도 그만이었으니 기꺼이 눈치를 보기로 했다. 자상한 남편이 싫어하는 것이 고작 색깔인 게 어딘가. 그러면서도 내심 궁금했다. 남편의 강박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처음 시댁에 방문하던 날 구석에서 쭈뼛대는 볼로디미르를 보고 그녀는 흑조를 떠올렸다.
"남자 구실도 못할 놈."
하하하. 조롱으로도 덮이지 않을 질투는 그의 입가가 아닌 눈에서 번뜩였다. 릴리와 이반이 잠깐 할머니댁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벌어졌던 한밤중의 혈투극, 볼로디미르의 바지춤을 잡고 그를 마당에 내팽개친 안드리이, 비몽사몽 한 채 맞으면서도 비굴하게 안드리이에게 매달렸던 볼로디미르, 난데없는 소동에 놀라 일어나 말리러 달려온 첫째와 둘째. 추억은 희극이었다. 안드리이의 아내는 무리에서 밀려나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가는 흑조를 보았다. 릴리를 닮아 찰랑이는 까만 머리칼과 몸짓 하나에 베여있는 릴리의 기품. 그리고 깨달았다. 남편이 가장 사랑한 것은 릴리의 까만 머리칼이었다는 것을.
볼로디미르의 후회는 정당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조카의 신음을 듣지 못했다면, 형수의 배에 박힌 칼을 빼내 주지 않았다면, 집 안에 브라와 팬티가 벗겨진 조카의 나체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가슴에 총알이 박힌 채 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형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더라면, 죄책감에 아이를 두고 집을 다시 나서지 않았다면, 알량한 동정과 혈육애를 느끼지 않았더라면, 집에 돌아와 보고 느낀 모든 것을 되새기지 않았다면, 도망치다 돌아본 조카의 눈에 스친 당혹감과 두려움을 기억에서 지웠다면, 군인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더라면, 형의 시신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형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형이 무사한지 궁금해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마을 사람들과 함께 피난을 갔더라면, 아내를 놓치지 않았다면. 그의 저항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워낙에 가냘픈 몸이었다. 총으로 얻어맞은 뺨이 발갛게 부풀어 올랐고 정신은 아득해졌다. 군인은 그를 어깨에 들쳐맸다. 그는 끌려가며 생각했다. 어쩌면 형이 맞았다. 남자 구실을 못하는 인생. 그게 바로 나의 삶이라는 것을.
아이를 마주한 건 군인의 어깨에 매달려 시내의 빈 집으로 끌려갈 때였다. 새벽의 칠흑과 붉은 지평선의 경계를 뚫고 아이는 빛이 되어 걸어왔다. 아이의 걸음 하나에 세상이 환히 밝아졌다. 아이는 순식간에 온 하늘과 땅을 밝혔다. 볼로디미르는 아이의 등 뒤로 터 오르는 해와 아이의 눈을 구별할 수 없었다. 그 눈. 그 눈은 잠들어 있는 세상과 자신을 깨웠다. 피범벅이 되어 다리를 절고 흙먼지와 땀으로 온통 뒤덮였어도 그의 눈만큼은 결연하고 단단했다. 빛이 뿜어져 나왔다. 볼로디미르는 절망했다. 슬픔이 물밀듯 밀려왔다. 이 정도에서 끝날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을 닮아 짙은 흑색 머리칼, 또래에 비해 작고 여린 몸, 자신보다 더 진하고 생기 있는 검은 눈동자. 릴리를, 그리고 자신을 닮은 아이의 아름다움이 사무치게 서러웠다. 백조일 수 없었다. 또다시 흑조였다. 고귀한 나의 아들. 그 어여쁨이 다른 이들에게는 눈에 띄지 않길 바라 평생을 가둬 놓으며 살았으나 빛은 숨길 수 없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이는 볼로디미르를 발견하고는 자리에 멈추어 섰다. 낯선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그곳에 가는 거예요? 왜 나를 버려뒀어요? 여태 무얼 한 거예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볼로디미르의 눈은 간절했다. 그의 시선은 아이를 마주하지 않았다. 아이의 뒤를 따라오는 소냐를 향해, 제발. 그의 눈은 처절했다. 소냐는 의기로웠을까 아니면 멍청했던 것일까. 소냐의 꼬리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볼로디미르는 무너지는 아이의 손을 잡아 주지 못했다. 총은 울렸고 가냘픈 신음소리가 등 너머로 들려왔다.
아이의 세상이 뒤틀렸다. 남자와 남자. 군인과 공장 노동자. 이십 대를 갓 넘은 청년과 사십 대 중반의 중년. 누군가의 아들과 누군가의 아버지. 거구의 체격과 가냘프고 호리호리한 몸. 짧은 머리와 까만색 직모. 파란색 눈과 짙은 고동색의 눈. 큼지막한 이목구비와 날카롭고 아름다운 생김새. 아이를 구성하는 모든 지각 체계가 붕괴했다. 감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차 인식할 수 없었다. 모든 사건이 사실과 사실의 충돌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었고 해석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볼로디미르는 의자에 두 손과 두 발이 묶여 있었고 몸을 덮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천장을 뚫을 듯 거대한 체구의 군인은 그의 얼굴을 움켜쥐고 있었다. 군인의 시선이 아이를 향했다. 볼로디미르는 수치를 느낄 새도 없었다. 그의 눈동자를 메운 것은 오직 공포였다. 아이는 그 눈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아이는 움직이는 법을 잊은 듯 보였다. 아이는 볼로디미르가 닭장수에게 잡혀 털이 뽑힌 한 마리의 백조 같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의 생각도 이성도 작동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자극은 거를 새도 없이 온몸을 통해 빠져나갔다. 볼로디미르는 재빠르게 눈알을 굴렸다. 군인의 눈 위로 떠오른 비릿한 욕정.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아이는 정신이 빠져라 달리고 또 달렸다. 다리가 찢어질 것 같아도 상관없었다. 두 손으로 다리를 부여잡고 절뚝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한 시라도 빨리 그 장소를 벗어나고 싶었다. 숨이 차올라 머리 뚜껑을 열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그래버렸음 싶었다. 나도 이 동네도 다 터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길 바랐다. 내 영혼까지 이 땅에 남지 않고 모두 조각나 떠밀려 갔으면 싶었다. 내 인생을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길 기도했다. 쓴 물이 올라왔다. 아이는 주저앉아 게워내기 시작했다. 먹은 것이 없는 탓에 노란색 물만 토해야 했다. 구역질하는 그 순간에도 그 잔상은 잊히지 않았다. 죽는 그 순간까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빌어먹을 예감이 들었다. 웩. 볼로디미르는 얼굴에서 손을 떼려던 군인의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우엑. 손가락을 문 채로 히죽 미소를 지었다. 입가는 뒤틀렸고 미소는 기이했다. 그는 한없이 나약했고 비굴했다. 그의 교태는 백조도 흑조도 그 무엇도 아니었으나 다만 공연은 성공했다. 우웨엑. 군인은 바지를 끌렀다. 그의 탄탄한 엉덩이에 힘이 실렸다.
아이는 교태로운 미소와 웃지 않는 눈의 간극에서 비로소 모든 것을 남김없이 게워냈다. 지친 몸을 벽에 기대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량한 빛깔과 새하얀 구름. 아무것도 남지 않은 뱃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다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거부하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구역질에 휩쓸리고 싶었다. 이제는 통제를 벗어난 일이었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을 나오는 아이의 손에는 식칼이 들려있었다. 아이의 눈은 결연함도 단단함도 보이지 않았다. 의식은 없었다. 그의 오른 다리는 뇌가 보내는 고통의 신호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성과 육체는 이미 분리된 지 오래였다.
아이는 빈 집의 뒷켠 창문 아래 벽돌을 놓고 올라섰다. 쓰러진 의자에 볼로디미르가 묶인 채 나뒹굴었고 온몸은 멍 투성이었다. 군인은 없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군인은 마치 하루의 일과를 마친 일꾼처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었다. 아이는 군인의 뒷덜미를 보았다. 총은 집 안에 있음을 확인했다. 한 번이면 족할 터였다. 그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거리도, 동력도 완벽했다. 아이는 칼자루를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