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듣다,

단편. 3화.

by 흩날림문고


볼로디미르는 마을을 떠나길 거부했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린 이후부터 마을 전체가 서늘한 흥분에 사로잡혔으나 그 만은 예외였다. 그는 어쩐지 결연하고 단호했다. 아이가 지나갈 때마다 마을사람들은 아이를 불러 세웠다.


"너희 집은 어떻게 하기로 했니?"


아이가 우리는 남기로 했다고 말하면 하나같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알 것 같았다. 왜 그런 표정밖에는 지을 수 없었는지. 볼로디미르는 마을에서 곱상하게 생긴 수려한 외모로 유명했다. 대개 이 지역 사람들이 그렇듯 건장한 체격과 다부진 위압감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키는 작았고 그의 팔다리는 얇고 매끈하게 뻗어 한 마리의 백조를 떠올렸다. 근육은 선천적으로 잘 붙는 편이 아니었기에 전통적인 남성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에 아래로 쳐진 부드러운 눈매, 오똑하고 날렵한 콧날, 붉고 도톰한 입술, 그리고 추위에 곧잘 발그레해지던 홍조까지. 한마디로 볼로디미르는 아름다웠다.


볼로디미르의 엄마, 릴리는 중국에서 원대한 꿈을 품고 날아왔던 발레리나였다. 특출 난 신체조건과 엄격한 노력으로 어린 시절부터 발레 유망주로 활동하다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에 스카우트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연 준비를 하던 와중 발목 부상을 입었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에 방황하던 나날이었다. 릴리는 자신이 올라가기로 예정되었던 공연이 성공적으로 치러지는 것을 보며 비참함을 느꼈다. 도망치듯 황급히 공연장을 빠져나오다 이반과 부딪혔고, 그는 그녀에게 한눈에 빠졌다. 중국으로 돌아가려던 그녀를 임신으로 족쇄를 채웠다. 이반은 자신의 고국으로 릴리를 데려왔다. 릴리는 어쩐지 안도했다. 러시아도, 중국도 그녀에게는 위안이 되지 못했다.


릴리는 아들만 다섯을 낳았다. 그녀의 유전자는 형제들 앞에서는 맥을 못 추렸다. 형제들은 이반을 똑 닮아 우람했고 키가 컸다. 성격도 거칠고 불같았다. 그래서인지 이반의 아들들은 모두 군인을 자처했다. 이반은 아들들이 매우 자랑스러웠다. 어딜 가나 집안의 자랑이었고, 그의 자랑이었다. 한 명만 빼면 딱 좋았다.


"아빠 우리도 떠나면 안 돼요?"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길 세 시간째. 아이의 입술은 파래졌고 손 발은 얼어붙기 시작했다. 외투도 챙길 겨를이 없이 쫓겨났다. 아이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었기에 노하우도 터득했다. 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몸을 최대한 둥글게 말았다. 몸을 둥글게 말면 몸의 표면적이 줄어들어 차가운 공기와 접촉하는 면적이 감소합니다. 아이는 유레카를 외쳤다. 과학은 이렇게 유용한 학문이었다. 아이는 수업을 그 어느 때보다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볼로디미르는 나약함을 싫어했다. 나약한 소리 따위는 집어치워!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걸음마를 떼려다 발을 헛디뎠던 순간에도 볼로디미르는 우는 아이를 그저 내려다볼 뿐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처음 패싸움을 하고 눈에 시퍼렇게 멍을 달고 들어왔을 때, 그는 아이를 가차 없이 팼다. 또 얻어맞고 오는 날엔 넌 나한테 죽는다. 그때부터 아이는 더는 고통을 직면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놓아버렸다. 그건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타티아나는 부엌에서 커틀릿을 만들 소고기를 다지고 있었다. 열에 달궈진 기름 속에서 공기방울이 올라왔다. 때에 맞추어 동그랗게 뭉친 고기 반죽 하나를 집어넣었다. 순식간이었다. 고기 반죽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기름은 일제히 솟구쳤다. 타티아나의 손바닥 위로 기름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얼굴에도 기름 덩어리가 튀었다. 부엌이 온통 번들거렸다. 타티아나는 자지러졌다. 그녀의 비명은 집안을 관통했고 전등이 흔들렸다. 아이는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거실로 튀어나왔고 부엌에 쪼그려 앉아 손을 부여잡고 울고 있는 타티아나를 발견했다. 속이 미슥거렸다. 수백 개의 바늘이 손바닥을, 그녀의 뺨을 찌르는 고통에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고통에 압도되어 울부짖으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지? 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지?


타티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있으나 껍데기만 남은 눈을 발견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비어버린 눈동자. 그 말 또한 무색했다. 자신을 향해 위치한 곳에 눈이 있었다. 요동치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못내 지겨웠다. 그 감정이 결코 낯설지 않았다.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타티아나는 바닥에 뺨을 대고 누웠다. 고통에 헐떡이면서도 울음조차 부질없이 느껴졌다. 뺨에는 빨갛게 흉이 남았다.


그리고 몇 해를 지나 다시 찾아온 겨울, 아이는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인대가 늘어났다. 다리를 절며 겨우 돌아왔고 현관 앞에서 신발을 고쳐 신는 타티아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양손에 짐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집에 들른 볼로디미르가 놀란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당신은 모든 게 연극이야."


아이는 두 번 다시 엄마를 볼 수 없었다. 볼로디미르는 예전과 같았다. 그는 나약함을 싫어했고 엄격했고 여전히 거칠었다. 아이 또한 이전과 같았다. 고통과 자신을 철저히 분리시켰다. 인대는 회복되었다. 볼로디미르와 사는 것에 익숙해졌고 여성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무탈했고, 내일은 순조로웠다. 모든 게 이전과 같았다.


가여워라. 불쌍한 우리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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