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듣다,

단편. 2화.

by 흩날림문고


거대한 침대였다. 천장도, 바닥도 거대한 침대 하나가 들어차니 버거울 정도였다. 집 안에 끼어있는 그것은 숨 쉴 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압살 했다. 유일한 생기는 누군가 썼음직한 누빔이불이 전부였을 정도. 거인이 살 법한 집이었다. 화려한 취향임에는 틀림없겠지만. 내부는 어두웠다. 겨우 시선을 더듬어야 어둠에 잠긴 볼록한, 수북한, 모서리진 형체가 만져졌다. 침대 모서리는 이쯤 있구나, 겨우 그 정도였다.


이상했다. 어떤 모양인지, 어떤 무늬의 베개가 몇 개 놓여 있는지는 전혀 보이지 않으나 오직 한 가지만은 선명히 빛을 발했다. 침대 아래로 삐져나온,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발바닥의 창백한 색감. 그것 만큼은 선명했다. 하나도 아니고 둘, 아니 셋. 어쩌면 그 이상.


발가락이 꼬물거렸다. 생애 첫 주름이 지기도 전에 침대 아래로 기어 들어갔던 것일까. 어쩌면 숨을 쉬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멈추는 법을 배워야 했는지도 모른다. 적막 속에 가라앉아야 했을 것이고, 오직 이따금만 뭍으로 나와 숨을 뱉는 것이 허용되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려준 이는 없었다. 양수 속에서 오직 탯줄만을 동아줄 삼아 태동했던 기억이 도움이 되었을까. 본능이었을 것이다. 몸은 그저 생존의 기색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난생처음 맞닥뜨린 혼란 속에 털을 곤두세우며. 팽팽한 심연. 죽은 듯 물에 잠겨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길 기다리는 통제된 숨소리가 집 안을 메웠다.


세상은 야속했다. 어째서 소리를 낼 수 없다 하여 간절함 마저도 희석되는가. 하늘에 눈과 귀가 없다 하여 바닥은 지워지고 마는 것인가. 묵직한 군화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진동이 바닥을 타고 전해진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소리를 따라 걷는다. 문 앞에 멈춰 설 때까지. 창백한 발바닥 사이 옅은 주름을 타고 붉은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일말의 비명도 새어 나올 틈이 없이 모든 것은 소멸한다. 집도, 침대도, 그 어떤 숨소리조차도 남지 못한다.






쿵.


소녀는 전율하며 벌떡 일어났다. 머리끝에 달린 숨이 내려올 줄 몰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대로였다. 비타민 가루를 넣은 물컵, 타이머를 맞춘 수험시계, 며칠 전 사온 펜과 샤프, 그 옆에 반이 닳은 지우개, 그리고 방금까지도 공부한 흔적이 남은 책. 소녀는 티슈 한 장을 뽑아 입가를 닦았다. 설마. 책 한 부분이 벌써 홍수가 났다. 티슈 반을 접어 이미 흥건해진 종이를 닦으니 울어버린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소련의 해체(1991)와 공화국의 독립.


시험이 코 앞이다. 이번 모의고사에는 등급을 올려야 한다. 소녀는 휴지를 구겨 책상 한켠에 던져놓고 펜을 들었다. 그때였다. 미세한 박동소리가 또 들린 것이. 소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움직임을 멈추었다. 또다시, 쿵. 방을 둘러보지만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살벌하게 마을을 쏘다니며 창문을 두드리는 칼바람 소리뿐이었다. 당연했다. 시계는 벌써 새벽 2시를 넘기고 있었다. 주택가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이 시간에 술 먹고 고성방가를 하는 대담한 이가 있을 리도 없었다. 대개 일찍 잠에 드는 가정주부, 야근에 절어 오는 회사원, 진즉에 잠이 든 어린아이들, 그것도 아니면 스터디카페를 다녀오는 수험생. 다른 가능성은 없었다.


쿵.


소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슬린다는 표시가 아니었다. 소리의 근원을 알아내기 위한 미세한 조정이었다. 하지만 진동하는 그 어떤 물체도 발견하지 못했다. 의아했다. 피곤해서 헛 것을 들었나. 설마 귀신은 아니겠지. 소녀는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었고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럴 리가 없지. 요새 잠이 부족해서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소녀는 책상 위 스탠드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틀며 생각했다. 생각을 없애자. 생각을. 생각... 그때 굳게 닫힌 창문을 뚫고 남자의 구토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 막 길을 잃으려던 찰나였다. 소녀는 번쩍 눈을 떴다.


아 깜짝이야. 아이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았다.


적나라한 소리였다. 이 동네에서는 평범한 범주에 속하는 일이라 할 수 없었다. 학군이 높기로 유명한, 그저 치열하여 조용한 동네였다. 대부분의 자녀들은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이곳을 가장 먼저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들어가거나 자취를 시작했다. 그들에게 자신의 고향이자 그들의 부모가 사는 이 동네는 가장 찬란해야 할 시간을 통째로 도려낸 공간, 결국에는 나와야 할 어미의 자궁 속 시간이었다. 따라서 예외는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괴로워하며 전부를 쏟아내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것을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올 면목이 없어 포장마차에서 거하게 술을 걸치고 온 사회초년생인가, 그것도 아니면 명예퇴직을 강요당한 가장의 처절한 발버둥인가. 제길, 오늘 잠은 다 잤다.


쿵. 쿵.


소녀는 하는 수 없이 일어났다. 뇌에 냉수를 끼얹은 또렷함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소리를 따라가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소녀는 귀를 기울였다. 꿈이기에는 너무도 생생한, 그렇다고 현실이라기에는 잡히지 않는 순간 속이었다. 소녀는 요동치는 소리의 파동을 목격했다. 의자를 빼고 앉았다. 침이 말라붙어 빳빳해진 종이 위로 천천히 귀를 가져다 대었다. 탄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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