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1화.
도시 전체가 잿빛으로 무겁게 짓눌렀다. 곧 비가 내릴 모양이었다. 어제 일기예보에서는 오늘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지나갈 때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그저 달기만 한 기분 좋은 냄새가 훅 끼쳐왔다. 아이는 어쩐지 설레었다. 아이는 블라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쉽기는 했지만 코끝에 새어 나오는 흥분은 감추지 못했다. 인생 8년 차에 접어든 아이에게는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이 이토록 모순적이라는 것에 적잖이 당황하였으나 이 또한 깊이 생각하지 못할 그럴 나이였다. 내일 또 보는데 그러지 못할 이유가 또 무언가. 오늘은 눈을 볼 지도 몰랐다. 그러면 내일 아침에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야지. 소냐와 함께 아무도 밟지 않은 소복이 쌓인 눈 밭을 뒹굴어야지.
소냐는 아이가 2살 때 엄마가 시장에서 데려온 강아지였다. 그때를 떠올려 보면 기억은 끊어져 있다. 그저 감각이 몸 구석에 베여있을 뿐이다. 어릴 때의 기억이 그렇듯 기억을 해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었으니 당연했다. 엄마의 코트에 덕지덕지 붙은 겨울 특유의 바람 냄새를 기억했다. 엄마는 쪼그려 앉아 불룩한 코트를 열어 보였다. 아이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뒷걸음쳤다. 차가운 물체를 만질 때면 엄마는 '앗 차가워'하며 뒤로 물러서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직은 아기에 불과한, 곤히 자고 있는 소냐는 그저 눈덩이로 보였다. 녹아내리는 눈덩이. 그러나 사라지지 않고 되려 뜨거운. 아이는 눈덩이의 배에 입술을 대었다. 뜨거운 눈덩이는 살아 움직였다.
소냐의 품종은 사모예드로 강아지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하루가 다르게 단단한 골격을 갖추었다. 아이는 소냐와의 모든 시간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끊어진 단편 속에는 질투도 있었다. 또래보다 유달리 작았던 체격에 비해 자신을 앞지르던 소냐가 꼴 뵈기 싫어 그가 먹던 밥그릇을 눈 밭에 던져버린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소냐는 공격으로 인식하지 않고 덤덤히 눈 밭을 가로질러 파묻힌 빈 밥그릇을 물어왔다. 배고프다며 보채지도 않았다. 문가에 기대어 지켜보던 엄마는 안도했다. 예민한 아이에게는 딱 맞는 무던한 동행자. 물론 지금은 아이도 소냐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집을 향하는 아이의 발은 가벼웠다. 차가운 공기는 가라앉았으나 발은 자꾸만 얼어붙은 땅을 딛고 날아오르려 하였다. 오전 수업 시간에 배웠던 노래가 하루종일 아이의 코끝을 간질이더니 부푼 마음을 못 이기고 이내 터져 나왔다.
"사랑하는 엄마~ 왜 자고 있지 않은지 내게 말해줘요~ 왜 나를 깨워 별을 보게 하나요~ 음음~ 내가 떠난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음~ 당신이 주신 수건은~"
뒷부분의 몇 가사는 미처 다 외우지 못해 흥얼임으로 메꿔 넣었다. 선생님이 뜻을 설명해 주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멜로디가 굳게 다문 입을 들썩이게 했다. 입이 벌어질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한 움큼 마른 입안을 적셨다. 아이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반가웠다. 겨울은 그런 존재였다. 되려 차갑게 피어 오른 훈기 사이를 유영했다.
어쩐지 문은 열려 있었다. 문 틈 사이로 익숙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시간만 되면 으레 들리는 텔레비전 소리. 분명 볼로디미르가 오전 작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것이겠지. 양말을 허물마냥 신발에 걸쳐 놓은 채로 냉장고로 걸어갔을 것이다. 냉수 반 통을 벌컥 들이키고 머리를 쪼갤듯한 고통을 지렛대 삼아 피로를 억눌렀을 것이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들었을 것이고. 뉴스를 볼 시간인 것이다. 볼로디미르는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모든 행동이 예상의 반경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이는 차라리 낫다고 여겼다. 어느 순간 말도 없이 사라진 엄마라는 사람보다는 엄하고 지루한 그의 삶이 백번 견디기 쉬웠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하루. 오늘이 아니면 내일 겪었을 그런 무수한 날들 중 하루. 아마 달랐던 것이 있다면 눈이 내린다는 예보였을까. 학교에서 새로 배운 노래였을까. 그도 아니면 지극히 평범했던 과거에 부여한 미래의 해석이었을까. 아이는 문을 차마 열지 못했다. 들어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서성였다. 이유는 없었다. 발을 내딛으면 어쩐지 소냐도 아빠도 눈도 손가락 사이로 형체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전쟁이 터졌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침공당했습니다."
아이는 창 너머로 이사를 떠나는 행렬을 지켜보았다. 짐을 한가득 짊어진 사람들. 몸 만한 배낭에 얼마나 꾸역꾸역 눌러 넣었는지 애써 닫은 덮개 사이로 금방이라도 옷가지며 조리기구며 모조리 뱉어낼 것만 같았다. 등에는 배낭을, 양손에는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서 블라드는 연신 뒤를 돌았다. 왜 이리 미적거려. 서두르렴. 가족들의 성화에 내키지 않는 발을 질질 끌며 다시 뒤를 돌았다. 그의 시선이 너머를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이내 체념하고 가족들에게 합류한다. 오늘 탄생의 숨과 모든 눈높이의 세상을 나누어 마신 단짝을 잃었다.
집은 전기가 나간 지 오래였다. 듣기로는 전력시설이 파괴되었다고 했다. 언제 복구될지 모른다고도 했다. 청소는 언제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설거지 거리가 가득 쌓여 이상한 냄새가 났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옷가지 더미가 구석에 쌓여 있었다. 한 때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내보고자 큰 마음을 먹고 구매한 곤색의 벨벳 커튼은 매캐한 먼지 냄새가 났다. 바닥에는 너저분히 널린 머리카락이 발에 밟혔다. 폐가 그 자체였다. 그것도 뱀파이어가 나올 것 같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오래된 산장처럼. 어쩌면 많이 다르진 않을 터였다. 이미 마을은 텅 비어버렸다. 아마도 아이의 가족이 마지막 남은 주민이 될 터였다.
아이는 소파 위에 앉아 커튼 뒤로 몸을 숨긴 채 창 너머를 응시했다. 블라드와 가족들이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이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슬픔은 없었다. 비관은 더욱 하는 법을 몰랐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엇을 실감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며칠간 밀어닥친 변화가 낯설었다. 당분간은 친구와 볼 수 없다는 것이, 노래가사를 더는 알 길이 없다는 것이, 학교에 두고 온 목도리를 찾아올 수 없다는 것이, 하루종일 집을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 심심함을 달랠 길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전쟁은 무엇일까. 영화에서 보던 아이언맨과 히어로들의 싸움? 아니면 외계인의 침투? 다만 지금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이 곧 이 마을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영화처럼 멋있는 대사를 준비해야 하나.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어야 할까. 엄마가 두고 갔으나 볼로디미르가 옷장 깊숙이 숨겨 놓은 두꺼운 금반지를 혹시 모르니 꺼내 두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맞서 싸워야 하는 걸까.
아이는 소파를 미끄러져 내려왔다. 아무렇지 않았다. 아쉬움 외에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이 시간을 제외하고는. 볼로디미르는 새벽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그리고 저녁에 한 번 꼴로 정찰을 나갔다. 새벽 찬기가 끼쳐오면 아이는 눈을 감은채 멀어지는 발소리 끝을 붙잡았다. 손을 뻗을 수 있었으나 시도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처절한 아우성을 밀어 넣어야만 했다. 그때부터 식은땀은 시작되었다. 발끝을, 다리를, 복부를, 그리고 얼굴까지 먹어 치우는 어둠. 억지로 의식을 끊어보려 했으나 한번 달아난 잠은 돌아올 줄 몰랐다. 이제는 아무도 없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
내가 보고 있을게. 나는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