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듣다,

단편. 4화.

by 흩날림문고


버스는 만원이었다. 오후 3시가 되면 이 동네는 멈춘 듯했다. 모든 것이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학생들은 겨울방학인 탓에 학원에서 공부를 했고, 가장들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근무 중이었으며, 주부들은 오전에 집안일을 다 끝내놓고 한숨을 돌리는 시간이었다. 밖에는 새벽부터 일어난 노인들이 느리게 가는 시간을 때울 길이 없어 어슬렁거렸다. 그러니 이례적일 수밖에 없었다. 소음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 이질감에는 자신도 포함이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아침부터 가슴 부근이 조여왔다. 답답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쓰러질 것 같다던가 하는 물리적인 통증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그 생각이 문제였다. 홧김에 학원을 뛰쳐나왔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그래도 소용은 없었다. 숨이 문제가 아니었나.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버스 안의 인파는 온통 구민회관에서 전시되는 '그' 작품 얘기뿐이었다. 구민회관은 마을을 내려다보는 뒷동산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동네의 다른 건물들에 비해 오래되었으나 비교적 최신에 리모델링을 하여 구색은 깔끔했다. 내부에는 시청각실이나 회의장, 동네 피아노 콩쿠르 같은 소규모 대회를 여는 다양한 크기의 홀이 있었고 대관으로 수입을 채웠다. 평소에는 저렴한 가격으로 영어회화, 연극, 리본공예, 요가 수업 같은 다양한 강좌를 열었다. 저녁이 되면 동산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잠시 회관 앞 벤치에 머물다 떠났다. 주말에는 철 지난 애니메이션이나 독립영화를 상영했다. 선거철이 오면 동네사람 모두가 이곳에 모여 투표를 했다. 마을의 상징이었다.


"내용도 모르는데 뻘쭘하게. 괜히 간다고 했나 몰라."

"딸내미 방학 숙제라며. 이참에 은성엄마도 공부도 좀 해. 요새는 국내 뉴스뿐만 아니라 세계정세도 알아야지. 중동전쟁이다 뭐다 세계가 불안정하잖아. 세계시민의식. 글로벌 시대에 강조되는 덕목이야."

"집안일하는 내가 뭐 아는 게 있나. 한진엄마처럼 가방끈이 길지도 않고."

"이참에 관심을 가져 봐. 세계에 얼마나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세계시민이고 나발이고, 우리 은성이 대학이나 잘 가면 좋겠구먼."

"대학도 중요하지만, 글로벌 리더가 되어야지."


소녀는 그들 앞에 서서 창 밖 너머를 보았다. 버스는 산으로 올라갈수록 덜컹였고 구민회관의 낡은 건물 꼭대기가 차츰 자태를 드러냈다. 버스 안을 메운 중년의 집단은 귀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소녀는 익숙지 않은 소음에 피로를 느끼며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차벨을 누르려던 찰나 멀리 구민회관 건물을 덮은 현수막이 펄럭였다. 소녀는 그들을 따라 내렸다.


'난민, 그리고 미래. 한명수 작가 사진전.'


구민회관의 내부는 평소와는 달랐다. 입구를 들어서면 나오는 넓은 로비의 가장자리부터 맞은편의 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그 너머의 복도까지 검은색 이젤이 줄지어 있었다. 먹구름이 잔뜩 끼인 탓인지, 전시를 위해 일부러 설치한 어두운 조명 탓인지는 몰라도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엄숙했다. 말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조금만 크게 말해도 다른 이들의 대화가 들릴 정도였다. 이젤 위에는 사진이 담긴 액자가 놓여 있었는데 검은색 페인트를 칠한 나무 액자였다. 흑백 사진 속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피난길에 오르는 가족을 뒤따르는 아이, 공터에 홀로 앉아 시간을 때우는 아이, 닳아 해진 공을 차는 아이들, 폭격으로 잔해만 남은 집 터에 주저앉은 아이, 비좁은 배에 욱여넣은 사람들 사이 부모를 놓칠세라 부여잡은 아이들, 흙바닥에 앉아 글을 배우는 아이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그림 주위에 머물렀다. 그들은 하나같이 진지했다. 사진의 의미를 찾아내려 하기도, 구도가 미적 기준에 부합하는 지를 재기도 하였다. 더러는 감동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림 가까이로 다가서지 않았다.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보이지 않는 선은 존재했고 암묵적으로 그 선을 넘으려 하는 이는 없었다. 성역일지 거부감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로비 중앙의 테이블 위로 하얀색 장미 꽃다발이 수북이 쌓였다. 사람들은 차례로 꽃다발을 놓고 작가에게 인사했다. 작가는 웃음기 없는 마른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사람들은 작가에게 악수를 청했고, 손을 쓰다듬었다. 버스에서 본 낯익은 얼굴 또한 줄에 녹아들었다. 그들은 작가의 곁을 맴돌았다. 그림은 곁눈질이면 충분했다. 그들의 관심은 그림에 머물지 않았다. 작가 또한 개의치 않았다. 자신에게 몰리는 사람들 사이로 가슴을 조금 더 내밀었고 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소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소리가 잦아드는 곳을 향해 걸었다. 회관의 이층에서는 주로 독립영화나 옛날 애니메이션과 같은 철 지난 영화를 매주 상영했다. 그러니 관람객이 거의 없는 건 당연했다. 소녀는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을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두 개의 정수리가 드문드문 보였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영화는 시작했다. 저고리를 입은 어린 소녀, 총칼을 찬 순사의 방문, 끌려가는 소녀들, 다리를 벌리고 있는 소녀와 안을 들여다보는 의사, 복도에 줄을 선 군인들, 칸칸이 던져진 소녀들과 그 안으로 들어가는 군인들, 저항하는 소녀들, 옷이 벗겨지고 바지를 벗는 행위들, 뺨과 몸 위로 번지는 피멍과 눈물, 쾌락에 절은 욕망의 눈, 애달픈 비명소리, 바짓춤을 끌어올리고 개운하게 방을 나서는 군인들, 침대에 널브러진 소녀들, 빛이 바랜 눈, 문이 열리고 또다시 들어오는 군인들, 반복되는 행위들.


버리고, 가시리잇고.


소녀들은 다리를 절었고, 하혈을 했고, 온몸에 피멍을 새겼다. 소녀들이 도망을 치면 총소리가 울렸고, 병이 든 소녀들의 등 뒤로 또다시 총소리가 울렸다. 쓸모 없어진 소녀들은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고, 그 위로 또 버려졌다. 군인은 불을 피웠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아래 피부가 오그라들고, 내장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날더러 어찌 살라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시청각실에 불이 켜졌고, 크레딧이 올라갔다. 한 이는 울렁거려 도중에 나간 지 오래였고, 다른 이는 보는 내내 훌쩍이다 불이 켜짐과 동시에 자리를 서둘러 벗어났다. 소녀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지러웠고 식은땀이 내내 흘렀으나 눈을 떼지 않았다. 끝까지 보아야 했다. 모든 것을 갈아 마셔야 했다. 몸 구석구석에 구겨 넣어야 했다. 거부반응이 있을지라도 삼켜야 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로비로 내려왔을 때 전시회는 이미 끝이 났고 불은 모두 꺼져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작가도 보이지 않았다. 장미도, 샴페인도, 엄숙함도 모두 텅 비었다. 여전히 남은 것은 액자에 걸린 하얀 눈동자들 투성이었다.


어느새 밖은 깜깜했다. 겨울이었고 해는 여섯 시면 자취를 감추는 계절이었다. 소녀는 구민회관을 등지고 언덕을 내려갔다. 인적은 드물었으나 저 아래 퇴근하는 직장인들과 학원에서 빠져나오는 학생들이 보였다. 모두가 치열했고 피곤한 기색이 짙었다. 하지만 그들의 발은 가야 할 곳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제 길을 찾아가는 발소리는 고요했고 안정되었다. 소음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돌아가야 했다. 그래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집으로 내달리는 차들 너머로 난 샛길이 보였다. 분명 옛적에 누군가 건넌 적 있는 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겁이 났다. 샛길의 흔적을 압도하는 무성히 자란 풀. 소녀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아스팔트 대로가 익숙했다.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환한 빛들이 점이 되어 무수해졌고 시야를 가득 메웠다.


나도 본 적이 있어 있어. 반짝이는 불꽃. 더 뜨겁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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