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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미상 Aug 07. 2020

'네가 사는 방식이 곧, 세계다'

내 세계를 나 답게 만든 한 마디


나는 철학자들이 남긴 말들을 곱씹는 일을 좋아한다. 철학에 달리 깊은 조예가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고, 나보다 한참 앞서 인생이라는 숙제를 무사히 마친 대선배이자, '생각하는 일'이라는 멋진 직업에 평생을 쏟아온 사람들이 고르고 골라 남겨둔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긴 말들은 마치 내게 인생 중 만난 난제를 풀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줄 중요한 실마리 같은 기분이 든다. 예컨대 먼저 방을 탈출한 사람에게서 얻게 되는 귀한 힌트 같은 느낌으로.


물론 나는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좋고 어떻게 나쁜 사람이었는지는 다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삶이 끝난 후 남은 사리 같은 문장들에서 그들이 부딪혀 살아낸 스스로의 삶을 얼마나 절실히 되뇌었는지는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뜨겁거나 냉정하거나, 각자의 온도대로 살았을 그들은 이미 없지만 그들이 남겨둔 말들은 오래도록 기다렸다가 적시에 운명처럼 나를 만나러 온다.

비단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세상에 남겨둔 말들엔 모두 그러한 면이 있다. 삶의 단면을 담아낸 시도 좋아하고 측면을 꿰뚫은 소설도 좋아하지만, 마치 목격담을 닮은 듯한 그들의 짧은 문장이 유독 각인되는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한 번뿐인 인생을 끝까지 통과하며 얻어낸 한 줄의 말에는 숭고함이 있다. 한 송이의 장미를 통째로 으깨어 겨우 얻어낸 한 방울의 향료처럼.


가슴에 진하게 남는 말들은 보석함에 넣어두듯 마음에 두었다가 자주 꺼내보곤 하는데, 지금 내 안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20세기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이다.



"네가 사는 방식이 곧, 세계다"



처음 이 말을 만났을 때,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잠시 멍- 했다. 당연하지만, 언제나 나는 나와 세계를 분리한 채 살아왔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세계라는 그릇 속에, 우연히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나라는 사람. 철학자들이 죽고 난 뒤에도 내가 태어나 살고 있듯이,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이 세계는 유지될 것이기에 나와 세계의 존재는 늘 별개의 것이었다. 그렇기에 저 말은 꼭 지나가던 내게 뜬금없이 던져진 돌멩이 같았다. 내 방식이 세계 자체라니? 나는 그 돌을 들고 갸웃거리며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헌데 찬찬히 생각해 볼수록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법 충격적인 진실에 가까웠다. 만약 내가 밥도 못 먹고 바쁘게 사는 사람이라면, 이 세계는 그저 밥도 못 먹고사는 바쁜 세계다. 누군가와 자주 다투는 사람이라면, 이 세계는 그저 다툼과 미움이 난무하는 세계다. 그 외에 다른 세계는 없다. 어딘가에 있다 해도 내 세계는 아니다. 내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나는 죽을 때까지, 내가 행하는 방식만큼의 세계를 갖는다. 그렇구나, 하고 그걸 깨닫고 나자 비트겐슈타인의 말 끝에 질문이 날개처럼 붙어 나를 향했다.



내가 사는 방식이 곧 세계다.

'그럼, 나는 어떤 세계를 살고 싶은가?'



하나의 명제와 하나의 질문이 짝을 이루어 나를 교정하기 시작했다. 그건 지금껏 흔하게 들어왔던, 그리고 상당히 논리적이고 계획적으로 답해야만 했던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어떤 성공을 하고 싶은가'와는 결이 다른,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차원의 질문이었다.


누군가에겐 두루뭉술한 말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저 문장 덕분에 삶의 한 시기를 무사히 통과해낼 수 있었다. 절망이 삶의 발목을 잡았던 그때, 내 머릿속은 흐린 안개로 가득했으나 한 가지 생각만은 명확했었다. 이런 세계에서는 단 하루도 더 살고 싶지 않다는 것. 그래서 나는 내게 고통을 주는 것들을 잘라내고, 남은 소중한 것들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택했다. 그 결과 나의 세계는, 매일 울며 잠들던 세계에서 점차 고양이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는 세계로, 맛있는 커피를 매일 음미하는 세계로, 초록색 빗소리를 달게 즐길 수 있는 세계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고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 세계로 그 모습을 완전히 바꾸었다.

내가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경험 끝에 다시금 마주한 그의 한 마디는 새삼 달라 보였다. 낯설기만 했던 첫인상과는 달리, '곧' 다음에 힘주어 찍혀 있는 쉼표마저 마치 가슴속에 저 문장을 단단히 고정해놓기 위한 핀 자국 같았으니까.


내가 바라는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를 답하면, 거꾸로 내가 살아가야 할 방식도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친절한 방식을 취하면, 그 순간부터 내 세계도 자연히 친절한 세계가 된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예측 못한 위기와 다시 마주한다 해도, 나는 내 세계가 어떻게 대처하는 세계였으면 좋겠는지를 먼저 스스로에게 묻고 그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어가는 방법 중 하나를 나는 습득한 것이다.


나는 내가 사는 세계가 친절한 세계이길 바란다. 선악과 강약을 구별하는 현명한 선이 있고, 가급적 다정하고 낙천적인 경향이었으면 좋겠다. 초조함은 적되 표현은 풍부하고, 크고 작게 웃을 수 있는 순간들을 많이 숨기고 있는 보물섬 같은 세계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오래 남을 한 마디를 낳을 수 있는 성숙한 세계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스스로 물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세계에서 살고 싶냐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매일을 시작하다 보면 좋은 방법들을 더 많이 익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멋진 세계와 만나 생각지 못한 더 멋진 확장을 이룰 날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내가 바라는 세계의 모습 중 빠뜨린 하나는, 좋은 향기처럼 좋은 기운을 퐁퐁 퍼뜨리는 세계도 있다. 그러니 우연히 나의 글을 마주한 당신에게 오늘 내가 물어봄으로 인해, 내일은 당신이 스스로 물어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도 참, 멋진 일이겠다.



"당신은, 어떤 세계를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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