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전하는 마음.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것에는 이름이 없고, 이름에는 때때로 부르는 자의 마음이 묻어 있습니다.
환향년.<화냥년 이야기> 김민주 작가 저
여기는 경이로워요 제 상상력으로 멋지게 만들 필요가 없는 곳은 처음 봤어요. 다들 애비뉴라고 부르겠지만 저는 앞으로 이곳을 ‘환희의 하얀 길’이라고 부를래요.
빨간 머리 앤 - ANNE.
오늘은 특히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본 날이었다. 원래 스쳐가듯 짧은 일기로 남기려 했지만 이름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매슈와 첫 만남에서 모든 것에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수다쟁이 소녀 빨간 머리 앤을 보다 보니 기나긴 말을 하고 싶어 글을 적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이름'이라는 두 글자에서 제일 가까운 이름인 '나의 이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필명을 쓰고 있지만 나에게는 실제의 이름이 있다. 남들이 처음 들었을 때 남자인가? 생각하게 만드는 이름.
나는 내 이름이 무진장 싫었다. 나도 '지수'나 '성경' 혹은 '선아' 같은 조금 여성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싶었다. 이름이 예쁜 아이들은 대체로 글도 잘 썼고 얼굴도 예뻤다. 남자들도 그 애들에게서 절로 풍겨 나는 여성적인 분위기에 홀려 금방 사랑에 빠지곤 했다.
반면에, 나는 내가 이렇게 투박해 보이는 것이 나의 이름 때문인 줄로만 알아서, 꼭 어른이 되면 개명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면 우울한 인상도 좀 펴질까 싶었다. 도대체 남자도 아닌 여자아이가 밝게 이을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내 이름에 대한 혐오감만 쌓여갔다. 90년대 그 당시에 철학관에 가서 10만 원을 넘게 주고 지었다는 이름. 이왕 평생을 부를 건데 예쁜 이름을 좀 지어주지. 언니는 그렇게 예쁜 이름을 주어서 예쁜 게 아닐까. 질투심이 일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유명한 구절이 하나 있다. 바로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시인의 작품에도 이름이라는 구절이 몇 번씩이나 나온다. 꽃이라는 장치를 썼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람을 말하기 위해 적은 글이어서 두고두고 입으로 외우게 된다. 왠지 이 구절을 발음하고 있노라면 오므리고 있던 내가 그제야 발견되어 펴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러지 싶다. 누구나 그렇듯 자라면서 자기만의 확신을 획득하게 된다. 나에게 그런 확신은 누군가에게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꼭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작은 햇살이 되어 부서졌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래도 버림받을 것 같으면, -빨간 머리 앤도 그랬듯- 자주 다른 이름으로 둘러대곤 했다. '코딜 리어라고 불러주세요. 아니면 …….'
적어도 그런 이름을 듣는다면 이제 쉽게 뒤돌아버리지는 못할 거라는 안쓰러운 자기 확신. 이름이 예쁜 아이는 조금 더 사랑스럽게 봐줄 거라는 처절함까지 포함한 안도감이었다. 그럴 때면 이제 좀 가까워져도 되는 걸까. 머뭇거리던 마음이 동동거리던 발을 조금이나마 잠재우는 것 같아서. '이제 그만 다가와도 돼.' 이런 낯간지러운 말 대신 친근한 어조로 이름을 불러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말을 내게 전해준 꼴이었다.
이름이라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의미다. 누군가의 일부가 되는 것. 혹은 되기 위해 준비하는 것. 나는 오늘 '이름 붙인다'는 말을 여러 군데서 계시처럼 들었다. 애정 어린 물건에 나의 손때를 자주 묻히는 것처럼. 나의 이름과 당신의 이름에 대해 놓쳤던 것들을 복기해보고 싶어서 이 글을 적는다. 나의 놓쳐버린 이름과 불리는 것에 대하여. 나는 너무도 궁금하니까. 앤이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빙빙 돌려 말한 것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마릴라가 그래 주었듯 나도 내 이름이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다. 나의 못생긴 이름을, 어루만져 줄 사람. 나에게 또 다른 애정 어린 별칭을 붙여줄 사람 말이다.
“평범해 빠진 앤 이죠.”
“괜찮은 이름이구나. 적당한 이름이야”
마릴라 커스 버드 대사 중.